지역에서 본 세상

한국군 민간인학살, 60년만에 진실규명 결정

기록하는 사람 2009. 1. 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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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지난 12일(월), 이 블로그에서 '이스라엘군 민간인학살, 한국군 학살은?' 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국제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계기로 삼아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의도로 작성된 글이었습니다.

다행히 약 5만 여 명에 가까운 분들이 글을 읽어주셨고, 또한 적지 않은 분들이 '비교 대상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의 글 의도는 이스라엘군의 학살이 대단치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수십 년의 세월동안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한맺힌 삶을 살아온 유족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자는 취지였습니다. 또한 과거사 진상규명을 무산시키려는 현 정부와 한나라당의 의도에 쐐기를 박고 싶은 마음도 있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어쨌든 공교롭게도 그 글이 나간 지 나흘만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글에서 제기된 경남 함양지역의 1949년 학살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론 이 블로그의 글이 영향을 끼쳤다기 보다는 위원회에서도 나름대로 진실규명 작업을 해온 결과입니다.

바로 오늘 오전입니다. 위원회는 오늘 오전 9시 전국 언론사 담당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이 블로그에서 제기했던 함양 민간인학살사건을 비롯,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총 5개 지역의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내산(치라골)마을 17명 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임이택씨입니다. 이분도 이번 진실규명 결정으로 맺힌 한을 절반이나마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실 규명' 결정이 내려지면 국가는 해당 사건 관련자에 대해 공식사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족들의 위령사업에 대해 행정이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며,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군인과 경찰에 대해 평화인권 교육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 자매를 느닷없이 아군에 학살당하고도 억울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온 유족들에겐 억만 금을 배상해도 시원치 않겠지만, 이것만이라도 유족들은 반분이나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는 아직 유골도 찾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유해 발굴작업에 나서야 하며, 무덤과 비석이라도 세워 유족들이 넋이라도 달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직도 공식기록이나 가해자의 진술이 없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이 미뤄지고 있는 다른 수많은 사건들도 하루빨리 진실규명이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함양을 비롯한 5개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진실규명 관련 보도자료를 첨부파일로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제88,89차전원위진실규명결정보도자료.hwp


보도자료 :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가.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실을 밝혀냄
나.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군이 1960년 10개 읍?면의 한국전쟁기 인적?물적 피해를 취합해 국회조사단과 경남도지사에게 보고한「1960년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서류철」등 정부관련 기록과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당시 군인과 경찰, 특공대원, 생존자와 목격자 진술조사를 실시함
다. 1948년 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하자,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기도 함

1960년 함양군 조사자료.

라. 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을 연행했으며 함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는 지서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국군을 보조하며 마을 동향 파악과 민간인들을 연행함
마.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함
   ― 수동면에서는 1949년 9월 18일 도북리 주민 35명에 이어 다음날 죽산리 주민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서와 함양경찰서를 거쳐 함양읍에 주둔한 군인들의 취조를 당함. 이 중 도북리 주민 32명은 9월 20일에, 죽산리 주민 17명은 다음 날 군인들에 의해 당그래산에서 집단 사살됨
   ― 안의면 주민들은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됨.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참고인은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함
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수는 86명이지만 진실규명 미신청자나 사건이후 멸족된 경우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는 이를 상회할 것으로 판단됨
사. 당시 희생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지리산, 황석산, 괘관산, 백운산 자락에 있는 산간 마을로 인근에 무주 덕유산, 거창 황매산과 접하고 있어 빨치산의 주요활동 지역이었음
아. 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하여 식량 등을 요구하였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보통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음
자.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로 확인됨. 함양경찰서와 특공대의 경우 빨치산토벌작전 과정에서 국군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다고는 하나 경찰과 특공대가 저지른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함
차. 진실화해위원회는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하에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힘
카.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등을 실시할 것을 권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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