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스라엘군 민간인학살, 한국군 학살은?

기록하는 사람 2009. 1. 1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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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의 한 마을 집에 민간인 110명을 몰아넣은 뒤 포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한 30여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지난 9일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됐다. 유엔은 보고서를 통해 "집안에 갇혀 있던 팔레스타인인의 절반가량은 어린이들이었다"면서 "가자지구 침공이 시작된 이후 가장 심각한 사건 중 하나"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하루 전날인 8일,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과 관련, 국군과 경찰이 반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439명을 불법적으로 집단학살했다며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순천지역 희생자는 439명으로 확인됐으나,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거나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2000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30여 명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민간인학살이 세계를 떠들석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 한국전쟁 전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번에 희생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이스라엘군은 '적군'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에는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이 넘는 우리 민간인이 '아군'인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됐다.

60년 간 은폐되어온 한국군의 민간인학살

어느 나라의 민간인학살이 더 중요하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학살은 발생 직후 곧바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철저히 은폐된 사건들이 태반이다. 특히 1948년 10월부터 1950년 6·26 발발 이전까지 전쟁시기도 아닌 상황에서 여순사건 반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중 '진실 규명'이 이뤄진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처럼 뒤늦은 진상규명마저 중단시키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사 관련 기구 통폐합과 인력·예산 감축 시도가 그것이다. 마치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산과 친일파 청산 무산 과정을 보는 듯 하다.

여순사건 반군 토벌과정의 민간인학살 피해는 여수·순천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경남의 함양과 산청에서도 죄없는 민간인들이 '반군에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군경에 의해 수없이 학살됐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산청군 시천·삼장면 학살이다. 이 지역 주민 수백 명은 1949년 7월에서 1950년 1월 말 사이에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강변, 신천리 신천국민학교, 원리 덕산국민학교 뒷산, 사리 농회창고 뒷산, 삼장면 평촌리 가막골 외 지리산 산간마을과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국군 제3연대 정보과, 제2대대 소속 군인들에게 집단살해당했다.

6·25 발발 이전의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사건 중 그나마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 규명' 결정을 받은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이면서도 아직 문서기록이나 가해자 진술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이 미뤄지고 있는 사건이 더 많다.

이스라엘군의 30명 학살이 발생 5일만에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60년이 다되도록 드러나지 않고 있는 우리지역 민간인학살 사건을 취재했다.

◇함양군 백전면 신촌·중기마을 학살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군들은 토벌군에 쫓겨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초 1000여 명에 이르렀던 이들 반군 빨치산은 1949년 봄 200여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9월 들어 토벌군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9월초 어느날 밤, 무장한 빨치산이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과 운산리 중기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밥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총을 들고 온 사람들이 밥을 해달라는데 안 해줄 도리가 있나요? 구장이 집집마다 몇 그릇씩 배정을 했고, 우리는 시키는대로 밥을 해줄 수밖에 없었지요."

주민들은 빨치산이 마을을 떠난 후, 즉시 경찰 지서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그로부터 몇 일이 지난 후였다. 낮에 전투경찰대가 마을에 들어왔다.

경찰은 오히려 빨치산이 다녀간 사실을 신고하러 갔던 사람들과 구장, 반장을 포함, 모두 11명을 윤칠월 열나흗날(양력 9월 6일) 연행해 갔다. 11명 중에는 오정현, 오기현, 오두현 등 3형제도 있었다.

경찰은 이들 중 오기현, 오두현 두 형제만 석방하고, 나머지 9명을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함양읍 이은리 남산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이후 유족들은 학살 장소도 알지 못한 데다 경찰이 무서워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한맺힌 삶을 살아왔다. 유족들은 정확한 사망날짜도 알지 못해 몇 년 뒤부터 끌려나간 윤칠월 나흗날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또 그로부터 보름쯤 후인 윤칠월 그믐날(9월 21일) 운산리 중기마을 전재옥(당시 35세) 씨 등 주민 12명도 같은 명목으로 경찰에 끌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소문으로는 수동면 본통고개에서 학살됐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시신도 찾지 못했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학살

역시 1949년 윤칠월이었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역시 밤에는 군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오지였다. 이에 따라 밤이면 빨치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목책을 세우고 죽창을 든 채 자체적으로 마을 경비를 섰다.

32명의 마을주민이 전경·군경에 학살된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어느날 밤 경비를 서고 있던 주민들은 이 마을의 이발사 정주상 씨가 짐을 챙겨 도주하는 것을 발견, 그를 붙잡아 수동지서에 넘겼다.

경찰은 정주상 씨에 대한 조사를 벌이며 그의 이발관을 수색하던 중 마을주민 40여 명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발견했다.

"그건 외상으로 이발을 하고 가을걷이를 마치면 곡식으로 이발료를 갚기로 한 외상장부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정주상의 허위자백을 근거로 그 명단에 적힌 사람들을 빨치산 협력자로 몰았어요."

당시 35세였던 아버지를 잃은 차용현(71) 씨의 증언이다.

경찰은 출타 중이거나 자리를 피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35명을 함양경찰서로 끌고 갔고, 혹독한 고문 끝에 32명을 함양읍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에 넘겼다.

결국 이들 32명은 군부대에 의해 함양읍 이은리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무참히 학살됐다. 그 날이 1949년 9월 20일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은 학살 후 마을 주민들의 집단반발을 우려해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강제로 이주토록 했다.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마을에서 행랑채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는 집을 태운 데 대해서도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주민들이 1949년 학살된 유해를 42년만에 발굴, 1992년 1월 마을 앞산에 합동묘를 조성한 후 위령비 제막식을 하고 있다.


이후 유족들은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학살현장을 찾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경찰에 구타를 당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골이나마 수습한 것은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1991년이었다.


유족들은 당그래산 현장에서 모두 3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주민들은 억울하게 학살된 32명 외에 이발사 정주상, 그리고 실제로 빨치산과 내통해온 여성 한 명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유해는 1992년 1월 18일 도북마을 앞산에 합동묘를 조성해 안장됐다.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내산마을(치라골) 학살

도북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내산마을(치라골)에서도 17명의 마을 주민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이 마을 역시 여순사건 반군들로 구성된 빨치산들이 곡식을 약탈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민들은 지서에 신고를 했지만, 오히려 신고한 사람들이 지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곤 했다.

"지서에서 신고를 하라고 해놓고, 막상 신고를 하면 뒈지게 맞는 거요. 밥은 몇 번 줬느냐, 빨갱이 심부름 몇 번 했느냐 하면서…. 두들겨 패면, 매에 장사 없다고, 그 사람들에게 밥을 한 번 줘도 열 번 줬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요."

치라골 학살로 형을 잃은 임이택 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형님 임한택(당시 22세) 씨를 잃었던 임이택(70)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그러던 어느날 경찰과 우익청년들이 마을에 들어와 30세 이하 청년 18명을 묶어 연행해갔다. 이들 역시 경찰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1명을 뺀 17명이 당그래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이 마을 총 30가구 중 17가구에서 한 명씩 희생됐던 것이다. 그날이 9월 21일이라고 유족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 마을 역시 학살 이틀 후 강제이주를 당했다. 주민들이 마을에 다시 돌아온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치라골 유족들은 도북마을과 달리 시신도 찾지 못했다. 이에 따라 도북마을 사람들이 유해발굴터에 비석을 세울 때 치라골 희생자들의 명단도 함께 새겨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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