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월 23일 현재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우연히 포털사이트에서 아주 불쾌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잊어라, 개발 바람에 '화성 벽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였는데요.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던 화성시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땅값이 크게 올랐고, 그 덕분에 '대대로 벼나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제법 많은 농지를 소유했던' 이 사건 용의자 이춘재의 모친(75세)도 '최소 수십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010년에 100평 크기의 땅을 매각했고, 2014년에도 다른 토지 200평을 매각했으니 당시 시세로 얼마라는 식의 기사였습니다.
무심코 클릭했다가 눈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 연좌제 시절도 아닌데,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개인 재산 내역이 까발려져도 되는 걸까요? 누가 그런 권리를 언론에 부여했나요?
연관된 기사를 보니 조선일보 기자는 최근 병원에 입원 중인 이춘재의 모친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더군요. <"모든 게 제가 자식을 잘못 키운 탓" 병상서 가슴 친 이춘재 모친>이라는 기사인데요. 모친은 "아홉 명을 다 우리 애가 했다는 거냐"고 기자에게 물었고, "가슴을 치며 울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 보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연로한 모친에게 기자가 아들의 추가 범행 사실을 알려주고 반응을 취재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김 씨는 아들 소식을 알게 된 직후인 지난 21일 퇴원해 자취를 감췄다."
악의적인 데다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모친의 가슴을 후벼판 후 그 반응을 취재, 보도하는 게 '국민의 알 권리'인가요? 그것도 모자라 그의 재산까지 추적해 '최소 수십억 원대'라는 보도를 한 이유가 뭘까요?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통해 뭘 말하고 싶었을까요? 국민의 시기심을 자극해 모친을 상대로 테러라도 부추기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대체 뭘까요?
아침에 읽은 또 하나의 기사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일보의 <[단독]검찰, 정경심 소환 불응에 체포영장 '최후통첩'>입니다.
기사는 검찰이 조국 법무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에게 그동안 수차례 출석 요구를 했으나 정 교수가 나오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면서 "정 교수가 지난 추석 연휴를 전후해 비밀리에 진료를 받았고, 최근 가족들과 회동을 했다는 정황"이 추가로 나왔다고 합니다. '비밀리에 진료를' 받았다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나요? 개인이 병원 진료를 받는 것도 언론에 통보하고 공개적으로 해야 하나요? 또 있습니다. 수사를 받고있는 사람은 '가족들과 회동'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가족과 만나는 게 무슨 큰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악의적인 서술입니다.
게다가 더 황당한 건 기사 마지막 문장입니다. 정 교수의 변호사 말을 빌려 "검찰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앞의 기사 내용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이죠. 그렇다면 두 개의 상반되는 사실 중 하나는 명백히 틀렸다는 건데, 그걸 확인하고 검증해야 할 기자가 이렇게 기사를 쓴다는 게 황당하지 않나요?
처음에 저는 '인터넷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이런 저급한 기사까지 쓰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이 기사는 23일자로 공식 발행된 한국일보 1면 머릿기사였습니다. 결국 명백한 오보로 밝혀졌는데요. 검찰도 정 교수를 소환한 적이 없다고 밝혔죠. 이런 오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정정보도와 함께 사과해야죠.
그런데 한국일보는 다음날인 24일자 2면 모퉁이에 '알려왔습니다'는 제목으로 정 교수 쪽의 입장을 짧게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반론권 보장 차원에서 정 교수 측의 주장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오보를 인정하는 대신 빠져나갈 구멍만 만든 거죠.
정말 비겁하지 않나요? 찌질하기까지 합니다. 저도 신문사에서 기자 노릇을 하며 밥을 먹어왔지만 정말 요즘만큼 갈 데까지 간 언론은 처음 보는 듯합니다. 아침에 눈에 띈 기사 세 개를 예로 들었지만 이런 쓰레기 기사는 매일매일 넘쳐날 정도로 양산되고 있습니다. 언론이 사회적 공기(公器)라고요? 아니 사회적 흉기가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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