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뉴스타파에 대한 기억 두 가지

김훤주 2017. 12. 3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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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 뉴스타파가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이든 후이든 관계없다. 윤승모가 성완종이 시키는대로 홍준표한테 1억원 뇌물을 건넬 때 정황을 특정했기 때문이다


윤승모는 척당불기 액자가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했고 홍준표는 척당불기 액자가 의원실에 걸려 있지 않았다 했다. 윤승모 기억이 맞다면 홍준표=뇌물이 성립하고 홍준표 얘기가 맞다면 홍준표=뇌물이 성립되지 않는다


뉴스타파는 이런 국면에서 척당불기 액자를 찾아냈다. 윤승모가 홍준표한테 뇌물을 갖고 드나들었다는 그 시절이다. 홍준표 의원실에 액자들 가운데 척당불기가 있었다. 대법원은 홍준표한테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현실은 홍준표한테 유죄를 선고했다. 대현실 판결의 지렛대는 바로 뉴스타파였다


이렇게 뉴스타파 생각을 하다보니 언제인가 뉴스타파와 인연이 떠올랐다. 2015년 가을이다. 고영주 당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옛날 검사 시절 부림 사건 등 공안 사건을 수사했지만 감금·폭행은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19857월 고영주한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 구속되었다. 그 때 나는 감금도 당하고 폭행도 당했다. 나는 내가 검사 고영주한테 당한 일을 사실대로 적었다. 당시 쟁점이 되었기에 이를 보고 뉴스타파에서 연락이 왔다


고영주.


찾아온 이들을 만나보니 나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젊은 친구들이었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여 점심에 때맞춰 해물이 잘 나오는 집으로 데려갔다. 이것저것 먹어보라 권하면서 두어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지금 생각하면 이런 모습이 꼰대로 비쳤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뉴스타파 친구들이 음식값을 낼 줄은 몰랐다. 나는 취재대상이었고 그이들은 취재 기자였다. 취재 기자가 취재대상한테 밥을 사는 일은 지금도 드물다. 게다가 나는 그이들한테 못났으나마 선배였다. 그런데도 그이들은 이런 모든 정황들을 쌩까버리고 음식값을 내었다


나중에 내가 내려고 계산대에 가니까 가게 주인이 '벌써 계산이 되었는데요', 했다. 민망한 생각에 열없는 얼굴이 되어 그 친구들한테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웃으면서. “회사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법인카드로 결제했으니까 걱정마세요.” 


회사에서 취재대상한테 음식 얻어먹지 말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법인 카드를 내어주기는 쉽지 않다


동아일보 사진.


또 하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2년 전에도 그랬다. 서울에 있는 신문·방송·통신들은 일이 있으면 사람을 자기네 있는 데로 불러올린다. 인터뷰를 하자면서 '오실 수 있어요?' 덧붙인다. 마치 '우리가 이렇게 다루어주고 신문방송에 내어주니까 고마워해야 하는 노릇 아니냐' 하는 듯이.


나도 그런 일을 몇 차례 겪어봤기에 뉴스타파가 인터뷰를 하자 했을 때 '미안하지만 나는 매인 몸이라 서울에 갈 수가 없어요',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 '당연히 저희가 마산으로 가야지요', 했다.(취재대상의 비굴한 자세도 실은 문제다. 보도만 된다면 간쓸개 빼줄 듯 구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스스로의 편의를 취재대상의 편의보다 앞세우지 않는 자세였다. 나는 우리나라 모든 신문·방송·통신들이 뉴스타파 정도만 해도 참 좋겠다. 뉴스타파 정도로만 취재대상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낮출 수 있다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관점도 어렵지 않게 형성되겠고 좋은 기사도 술술 떠오를 것 같다. 척당불기 액자를 찾아내는 프로젝트도 어쩌면 이런 덕분에 기획이 되고 진행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실은 작은 변화가 아니다. 대단한 업적도 어쩌면 작은 변화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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