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우리지역의 산, 강, 역사와 문화, 유적, 풍습, 토박이말, 음식, 특산물, 전통시장, 기업, 인물 등을 스토리텔링하여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이를 책으로 엮어 유통시킴으로서 그 콘텐츠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마땅히 지역문화 진흥과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지방정부(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이다. 실제 역사와 문화, 자원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지역공동체가 얼마나 탄탄한 정체성으로 뭉쳐있는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것이 곧 그 지역의 브랜드가 되고 공동체 구성원의 긍지와 자부심이 된다.
그러나 역대 경남도지사나 시장·군수 중 이런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드물었다. 길을 뚫고 다리를 놓고 신도시를 개발하고 공장을 유치하는 하드웨어, 콘크리트 사업에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이런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소프트웨어 사업에는 인색하다 못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지역언론이 공익 출판사업을 하는 까닭
우리는 경남도와 시·군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지역언론이 나서서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스토리텔링을 통한 콘텐츠 생산에 나선 이유다.
사실 이 작업은 2012년 <경남의 재발견> 시리즈를 신문에 연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발품으로 찾아낸 역사·문화·관광 인문지리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콘텐츠는 2013년 책으로 정식 출판되었고, 지역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과 평가를 받았다.
경남도민일보는 그때부터 '지역신문은 단순한 뉴스 기업이 아니라 종합콘텐츠 기업이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도서출판 피플파워·해딴에'를 통한 출판사업을 본격화했다. 1회성으로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소비되고 마는 기사 외에도, 앞서 열거한 산, 강, 역사와 문화 등 우리지역의 자산·자원에서 콘텐츠를 뽑아내는 일 또한 지역신문이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경남도민일보 도서출판 피플파워, 해딴에가 낸 책
<경남의 재발견>(이승환 남석형 지음)에 이어 '경남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남석형 외 3명 지음), '경남의 자산 스토리텔링' <한국 속 경남>(남석형 외 2명 지음) 등 공익콘텐츠 발굴 기획 3부작이 잇달아 출간됐고, 이밖에도 지역출판사가 아니라면 나오지 못했을 책들이 지난 3년간 생산됐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경남지역 주요 인물의 삶을 스토리텔링한 <열두 명의 고집인생>(김주완 지음)
경남 전통시장 20곳을 스토리텔링한 <시장으로 여행가자>(권영란 지음)
전국 20여 개 마을을 스토리텔링한 <사람사는 대안마을>(정기석 지음)
부산·경남지역 여성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취업 대신 꿈을 창업했다>(윤거일 지음)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받는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의 삶과 어록을 기록한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묶은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박영주 기록)
지역사회가 발굴한 논객 홍창신 칼럼집 <인생역경대학>(홍창신 지음)
교과서에선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 <대한민국 악인열전>(임종금 지음)
우리사회에 희망을 주는 지역인물 스토리텔링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김주완 지음)
청소년부터 읽는 항일투사·친일파 이야기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선안나 지음)
500리 물길 따라 만나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 <남강오백리 물길여행>(권영란 지음)
경남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경남의 숨은 매력>(김훤주 지음)
통영~한양을 이은 조선 고속도로 <통영로>(최헌섭 지음)
서점에서 유통되지 않는 책은 생명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우리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 문화, 인물, 특산물, 시장, 자연을 의미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진 않는다. 무생물인 책에 생명을 주는 것은 독자다. 독자는 서점이라는 유통망을 통해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그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출판기획자가 아무리 가치 있는 책이라 생각하더라도 독자가 없는 책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독자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언제든 사서 읽을 수 있도록 시장에 유통되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책을 만드는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인쇄·제본소에서 나온 이후 유통에 더 많은 노력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책은 한국의 모든 인터넷서점 외에도 전국 70여 개 거점 서점을 통해 유통된다. 부산 영광도서, 창원 그랜드문고와 학문당, 대신서점, 진주 진주문고 등과는 직거래 관계에 있다.
사실 기획·편집·디자인·인쇄·제본·배본·총판, 심지어 DM 발송대행사와 대형서점까지 모든 출판 인프라가 서울로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지역출판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콘텐츠의 가치와 우리가 구축해온 SNS 영향력을 믿었다. 이른바 '책의 발견성 확보'를 위해 경남도민일보가 가진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플러스친구 등 모든 SNS를 총동원했고, 필자 개인의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도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그동안 우리가 낸 책은 대부분 2쇄 이상을 찍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해 보고 낸 책은 없단 얘기다.
지방정부도 지역콘텐츠 생산에 관심 기울여야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이 지역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홀대하는 건 여전하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점 MD(merchandiser)와 직접 만나 책을 홍보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서울에 영업사원을 둘 여건도 안 된다. 더구나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청,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등에서도 지역출판물에 대한 우대 정책은커녕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역출판을 계속하는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역출판이 없으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역이 보유한 유무형 자산·자원에서 생산되는 지역콘텐츠도 맥이 끊기게 되기 때문이다. 지역콘텐츠가 없으면 지역의 정신문화도 사라진다.
한 나라의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홈플러스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는 전 국민의 소비 형태를 획일화·평준화시킨다. 그러나 전통시장에는 그 지역 고유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살아있다. 이렇든 지역콘텐츠는 창조성의 원천이 된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돌베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된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해왔다."
우리 지역을 변화와 창조 공간으로 만들어 문명의 중심지가 되려면 지역출판을 통한 지역콘텐츠 생산을 독려하고 부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 아닌 누가 해주기를 기대하기보다 우리 지역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부터 '지역출판물 우선 구매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물론 서점을 통해 유통되는 책에 한해야 할 것이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도 좋다. 콘텐츠 생산력을 가진 저자를 지원하는 방식도 있다. 이른바 '저술 지원' 방식이다. 지금부터라도 지역콘텐츠를 살리고 정신문화를 살찌우기 위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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