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볕 좋은 어느 날, 김주완 편집국장과 저는 잔잔한 물결을 내려다 봅니다. 오른쪽에는 고즈넉한 성이 의젓하게 서 있습니다. 성 안에는 그 생김새로 나라 안에서 손꼽는 누각 한 채가 서 있습니다. 누각은 촉석루, 성은 진주성입니다. 물론 바라만 봐도 흐뭇한 물결은 남강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국 템스(Thames)강보다 진주 남강이 훨씬 멋있습니다.”
얼마 전 영국 연수를 다녀온 김 국장이 혼잣말처럼 얘기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아쉬운 듯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남강이 멋지다는 것을 진주 사람이 더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깝고 익숙하기에 귀하고 매력적인 줄 모르는 우리 것 다시 보기, 돌이켜보면 <경남의 재발견> 구상은 그때 짧은 대화에서 시작합니다.
-첫 단행본 <경남의 재발견>(비매품) 머리말 중에서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모르는 것들
2013년 9월 출간된 <경남의 재발견> 머리말은 위의 글로 시작된다. ‘발품으로 찾아낸 역사·문화·관광 인문지리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구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경남을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뿌리깊은나무’ 한창기(1936-1997)라는 걸출한 출판기획자를 알게 된 것과, 그가 기획하여 1983년 펴낸 <한국의 발견>(전 11권) 시리즈를 접했던 일이다. 그 중 ‘경상남도 편’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과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의 깨달음이 ‘가까이 있고 늘 볼 수 있으며 익숙한 것일수록 오히려 그 가치와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진1. 1983년 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시리즈
2013년은 <한국의 발견>이 세상에 나온 지 꼭 3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에 맞춰 <경남의 재발견>을 우리가 내놓기로 하고 2012년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이를 담당할 두 기자에게 <한국의 발견> 경상남도 편을 정독하도록 했다. 그 후 현재 시점에서 꼭 다뤄야 할 것들을 추렸다. 통합하기 전 마산·창원·진해를 포함, 경남 20개 지역에 대한 인문지리지 <경남의 재발견>은 그렇게 탄생했다.
처음엔 ‘공익콘텐츠’라는 점에서 각 시·군의 도움을 얻어 비매품으로 펴냈지만, 서점을 통해 유통시켜보고 싶었다. 2013년 11월 판매용 <경남의 재발견> 해안편과 내륙편(도서출판 피플파워, 각권 1만 5000원)이 교보문고와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영풍문고 등에 배포됐다. 이듬해에는 도서총판을 통해 전국 주요 거점 서점에도 우리 책을 깔았다.
사진2. 2014년 출간한 <경남의 재발견>
그때부터 나는 우리 회사 안에서나 외부 강의 때마다 ‘지역신문은 단순한 뉴스 기업이 아니라 종합콘텐츠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고, 내 역할은 자연스레 ‘콘텐츠 기획자’가 되었다. 그런 콘텐츠를 담아내기 위해 신문에서 출판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지역출판사가 아니라면
나오지 못했을 책들
2014년 7월 경남도민일보 출판미디어국이 신설됐고, 우리는 웹사이트와 SNS, 모바일사이트 등 뉴미디어사업과 함께 지역출판을 본격화했다. 월간지 <피플파워> 발간도 우리가 맡았다. ‘민중의 힘’을 의미하는 ‘도서출판 피플파워’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이런 책을 출간해왔다.
경남지역 주요 인물의 삶을 스토리텔링한 <열두 명의 고집인생>(김주완 지음)
경남 전통시장 20곳을 스토리텔링한 <시장으로 여행가자>(권영란 지음)
전국 20여 개 마을을 스토리텔링한 <사람사는 대안마을>(정기석 지음)
부산·경남지역 여성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취업 대신 꿈을 창업했다>(윤거일 지음)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받는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의 삶과 어록을 기록한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묶은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박영주 기록)
경남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남석형 외 3명 지음)
지역사회가 발굴한 논객 홍창신 칼럼집 <인생역경대학>(홍창신 지음)
교과서에선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 <대한민국 악인열전>(임종금 지음)
우리사회에 희망을 주는 지역인물 스토리텔링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김주완 지음)
청소년부터 읽는 항일투사·친일파 이야기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선안나 지음)
500리 물길 따라 만나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 <남강오백리 물길여행>(권영란 지음)
경남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경남의 숨은 매력>(김훤주 지음)
경남의 19가지 자산을 스토리텔링한 <한국 속 경남>(남석형 외 2명 지음)
물론 이 외에도 여러 책들이 피플파워에서 나왔지만, 위의 목록은 지역출판사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콘텐츠들만 뽑은 것이다.
사진3. 2014년부터 경남도민일보 도서출판 피플파워가 펴낸 책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독자의 선택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우리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 문화, 인물, 특산물, 시장, 자연을 의미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진 않는다. 무생물인 책에 생명을 주는 것은 독자다. 독자는 서점이라는 유통망을 통해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그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와 출판기획자가 아무리 가치 있는 책이라 생각하더라도 독자가 없는 책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독자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언제든 사서 읽을 수 있도록 시장에 유통되어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책을 만드는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인쇄·제본소에서 나온 이후 유통에 더 많은 노력을 쏟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우리 책은 한국의 모든 인터넷서점 외에도 전국 70여 개 거점 서점을 통해 유통된다. 부산 영광도서, 창원 그랜드문고와 학문당, 대신서점, 진주 진주문고 등과는 직거래 관계에 있다.
서점이 사라지는 지역에서 무모한 도전
지역출판사가 없으면
지역콘텐츠도 생산되지 않는다
사실 지역에서 지역 저자의 지역콘텐츠를 갖고 출판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다.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60~70%가 서울·경기 등 이른바 수도권에 있다. 나머지 30~40%의 다른 지역 소비자 중에서도 상당수가 예스24나 알라딘, 인터파크,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인터넷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입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역 서점은 갈수록 살아남기가 어렵다. 2003년 228개였던 경상남도의 서점 수는 2013년 147개로 10년 만에 35.5%가 줄었다. 옛 마산지역만 보더라도 80~90년대 50~60개가 있던 서점은 현재 24개만 남았다. 이마저도 문구점를 겸해 참고서만 다루는 서점이 대부분이고 순수 서점은 6개뿐이다. 게다가 함양·산청·의령군의 경우 각 1개씩의 서점만 살아남아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아예 서점이 없는 지자체도 곧 나올 것 같다.
사진4. 진주문고에서 자신의 삶을 기록한 <풍운아 채현국>을 보고 있는 채현국 어른
게다가 인쇄·제본소는 물론 배본사나 총판, 심지어 DM 발송대행사도 경기도 파주와 고양 일대에 모두 밀집해있다. 실력 있는 북 디자이너나 편집자도 서울에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인쇄를 비롯한 모든 비용도 서울 이외의 지역이 훨씬 비싸다. 인쇄 기술과 품질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경상남도에 출판사나 인쇄사로 등록된 업체는 1500개가 넘지만, 전국 서점 유통망을 통해 판매되는 책을 내는 출판사는 3~4개 정도밖에 없다. 내가 알기론 우리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상대학교 출판부 지앤유, 그리고 지난 2011년부터 통영에 터를 잡고 지역 출판을 시작한 남해의 봄날, 진주에서 출판업을 시작한 펄북스, 하동의 상추쌈 정도가 고작이다. 그 외 대부분 출판사는 말이 출판사이지 자비 출판이나 관급 인쇄물을 찍어주는 인쇄대행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출판사가 상당히 많았고, 전국 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을 통해 그런 출판사가 낸 책들이 상당히 많이 팔리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점점 서울 집중이 심화하면서 지역출판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서울로 옮겨갔다. 대구에 있던 녹색평론사도 언제인지 서울로 가버렸다.
그래도 버티고 남아 있는 건 현재 이 스토리펀딩에 참여하고 있는 출판사들뿐이다. 이들마저 안 되면 지역출판은 씨가 마를 지경이다. 그러면 지역콘텐츠도 더 이상 생산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역출판 지원 정책도 없다. 지역콘텐츠 진흥 차원에서라도 필요할 법 한데, 이런 데 관심을 갖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는 까닭
이런 상황에서 경남도민일보는 2014년 하반기부터 본격 출판사업을 시작했다.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지역콘텐츠의 가치를 믿었다. 예전에는 지역에서 책을 내면 그걸 알릴 수단이 없었지만, 지금은 SNS가 있다. 지역콘텐츠로 지역에서 책을 만들어 SNS를 통로삼아 서울로 치고 올라가보자는 거였다. 또 신문사와 함께 하는 출판인만큼 기존 신문 독자들을 통한 홍보효과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출판사 블로그와 페이스북 페이지, 카카오스토리 채널을 열었다. 또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그 책의 제목으로 페이지를 개설하고, 저자와 우리가 가진 SNS 인맥을 총동원해 마케팅에 나섰다.
이들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독자들의 서평이나 리뷰, 저자의 근황, 책 판매 상황, 이벤트 등 소식을 올리고 있는데, 포스트 1건당 평균 도달 수가 2000여 회에 이르고 있다. 그 중 <풍운아 채현국> 페이지 팬은 3000명이 넘었고, 그들이 다시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책을 알려줬다. 내 개인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도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그동안 우리가 낸 책은 대부분 2쇄 이상을 찍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해 보고 낸 책은 없단 얘기다.
그러나 여전히 어렵다.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이 지역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홀대하는 건 여전하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점 MD와 직접 만나 책을 홍보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서울에 영업사원을 둘 여건도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청,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등에서도 지역출판물에 대한 우대 정책은커녕 관심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역출판을 계속해보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역출판이 없으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역이 보유한 유무형 자산·자원에서 생산되는 지역콘텐츠도 맥이 끊기게 되기 때문이다. 지역콘텐츠가 없으면 지역의 정신문화도 사라진다. 역사와 문화, 자원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지역공동체가 얼마나 탄탄한 정체성으로 뭉쳐있는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것이 곧 그 지역의 브랜드가 되고 공동체 구성원의 긍지와 자부심이 된다.
사진5. 먹거리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 표지.
사진5. 먹거리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 본문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한 나라의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홈플러스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는 전 국민의 소비 형태를 획일화·평준화시킨다. 그러나 전통시장에는 그 지역 고유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살아있다. 이렇든 지역콘텐츠는 창조성의 원천이 된다.
신영복 선생은 최근 펴낸 <담론>(돌베개, 1만 8000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된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해왔다.”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은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며 “그게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사진6. 교보문고 창원점의 지역출판사 전용 매대
우리 지역을 변화와 창조 공간으로 만들어 문명의 중심지가 되려면 지역출판을 통한 지역콘텐츠 생산을 독려하고 부양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 아닌 누가 해주기를 기대하기보다 우리 지역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부터 ‘지역출판물 우선 구매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물론 서점을 통해 유통되는 책에 한해야 할 것이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도 좋다. 콘텐츠 생산력을 가진 저자를 지원하는 방식도 있다. 이른바 ‘저술 지원’ 방식이다. 지금부터라도 지역콘텐츠를 살리고 정신문화를 살찌우기 위한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아직은 외롭고 힘들지만 함께 하는 전국의 지역출판사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몇 년 되지 않은 초보 출판인이지만 그들과 서로를 북돋우며 길고 오래 이 길을 가보려 한다.
글 |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도서출판 피플파워 편집책임
※포털 다음 스토리펀딩에 아래 제목으로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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