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노루표 페인트 노동자와 도종환 시인

김훤주 2011. 1. 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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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글이 떠올려준 노루표 페인트 노동자

<한겨레> 2010년 12월 25일치 18면을 보면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스물여섯 번째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책임 저편의 무책임… 미안하고 아팠습니다'입니다.


이 글을 읽다 보니 1985년 감옥에서 만났던 노루표 페인트 노동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그해 7월 스물세 살 나이로 서울구치소에 들어갔는데, 두 살인가 많았던 노루표 페인트 노동자 형은 저보다 앞서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형은 이번이 두 번째라 했습니다. 국민학교만 나왔다는 그 형은 키가 작았습니다. 저는 키가 184cm인데 그 형 머리는 제 어깨 높이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 형은 활달했습니다. 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형은 자기가 노동쟁의를 벌이다 붙잡혔는데, 두 번째라서 이번에는 선고를 받으면 집행유예가 아니고 실형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는 집행유예가 틀림없으니 걱정말라 했습니다.

벌써 26년 전 일이 됐습니다. 그 형은 나중에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를 떠나 기결수만 있는 다른 교도소로 갔습니다. 저는 이듬해 1월 8일 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도종환 시인이 기억하는 자기자신의 감옥살이


전교조 조합원 출신인 도종환 시인의 이번 글에는 자기 감옥살이하다 출옥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렇습니다.

"집으로 와 보니 생일 케이크가 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출옥한 날이 마침 제 생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추레하고 초췌해지신 모습으로 방에 앉아 계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죄스러운 마음으로 절하고 고개를 드니 어린 딸이 옆에서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재판을 받는 날 법정에 나가 봐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집안이 어수선할 때 딸애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그만 팔을 분지른 것입니다."

"……다섯 살 어린 팔 안에 두 개의 철심을 박은 채 딸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서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책임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되는가를 나는 두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생일 케이크에 머리를 박고 울고 싶었습니다. 밥상을 주먹으로 깨부수며 소리지르고 싶었습니다. 딸애에게 미안했고, 어머니께 죄스러웠고, 나 자신이 미웠습니다. 이런 시대가 미웠습니다."

"도 단위 또는 시군 단위 지부나 지회를 창립하고 지부장이나 지회장 책임을 맡으면 바로 다음날 도교육청에서 징계위원회를 열어 직위해제를 하거나 해임처분을 내리던 때였습니다.

…… 그래서 책임을 지겠다고 결정하면 해임당하고 학교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이번만은 빠지고 싶었고,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했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책임진다고 생각하며 사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책임지지 못한 아픈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제 자신의 감옥살이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닌줄은 잘 알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1985년 당시 저는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언론출판연합체' 대표를 맡고 있었습니다. '언출련' 이름으로 신문 <선구자>와 기관지 <일보전진>을 냈습니다.

언출련은 모두 다섯으로 짜였는데, 문과대학 대표격인 저를 비롯해 총학생회 홍보부장과 써클연합회 홍보부장, 정경대학 대표와 대학 매체 대표 등이 구성원이었습니다.

이렇게 활동을 하는 도중에 우리와 무관하게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터졌고 검찰은 농성을 주도했던 삼민투는 투쟁조직으로 우리 언출련은 선전조직으로 나눠 마치 조직적·체계적으로 움직인 것처럼 사건을 만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때 언젠가는 감옥에 갈 것으로 예상하고 논의를 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면 졸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던 때였습니다. 데모를 하고 구속이 되고 그러면 제적이 되고 그랬지요.

도종환 시인 적은 그대로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는 얘기를 했습니다. 구성원 다섯 가운데 언출련만 전담하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맡은 일을 하면서 언출련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언출련과 관련된 책임은 제가 지기로 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논의가 있고 난 직후 경찰이 학교를 덮쳐 우리가 애써 펴냈던 기관지 <일보전진>을 모조리 압수해 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종환 시인이 책임을 지고 구속된 것처럼 저도 책임을 지고 구속이 됐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식구들과 저희 집안 식구들


도종환 시인의 아버지 어머니가 추레하고 초췌해지신 것처럼 제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시인 딸애가 팔을 부러뜨린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하게 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했습니다.

글을 읽어보면 도종환 시인의 딸애가 팔을 부러뜨린 것이 도종환 시인이 구속된 데 원인이 있는 것처럼 비치지는 않는데, 마찬가지로 제 어머니 세상 떠난 것도 꼭 제게만 까닭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정황은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구속돼 있는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감옥에서 저를 만나면 어떤 충격을 받을지 몰라서 면회도 오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독실한 신자이신 어머니는 날마다 기도를 하셨습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나날이었겠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다 제가 석방됐습니다. 좀 있다 구속과 동시에 내려졌던 무기정학도 풀려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따뜻한 봄날 어머니는 시골 집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제들도 저더러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은 니가 구속되는 바람에 바짝 긴장했다가 석방되면서 풀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 스스로도 어머니 세상 떠난 책임이 저한테 있다고 여기며 삽니다.

제가 별로 아파하지 않았던 까닭들

도종환 시인이 스스로에게 말한 바처럼 저도 '개인적으로는 책임지지 못한 아픈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저는 별로 아파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아파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3사하(舍下) 27방(房)에 머물렀습니다. 1방부터 29방까지 1층과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방 위는 3사상(舍上)27방이 됩니다.

제가 들어갔던 85년 7월에는 저 같은 시국사범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니까 방마다 시국사범이 차고 넘쳤습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저랑 함께 '언론출판연합체'를 이뤘던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 시위를 벌이고 주동을 하다 구속이 됐을 정도였습니다. 결국에는 모든 사동(舍棟)의 1방부터 29방까지 가운데 홀수방은 시국사범들 차지가 됐습니다.

붙잡혀 온 그 많은 사람들한테 저마다 사연이 없겠습니까?

평소에도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 형 눈에 밟혀 운동을 계속해야 할지 망설여진다는 얘기를 숱하게 나눴는데, 또 생떼 같은 자식 구속되고 다치는데 마음 편하게 지낼 부모 식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27방에 있는 제 상황이나 25방에 있는 신정훈이 사연이나 아니면 29방에 있는 이종원 형 사연이나 아니면 멀리 다른 사동에 있었던 김병곤 선생 사연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로 대표되는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아픔은 누구나 다 겪게 마련이고 그런 아픔은 그냥 견뎌내면 그만이지 거기 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파하고 죄스러워 할 건덕지조차 없었던 노루표 노동자


이런 점에서 저는 도종환 시인과 달랐던 것 같습니다. 노루표 페인트 그 노동자 형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랬습니다. 노루표 페인트 그 형은 자기한테 면회 오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어릴 적부터 의지가지 없이 지내온 때문이겠지요. 노루표 페인트가 아주 규모가 있거나 조직이 잘 돼 있는 사업장이 아니어서 함께하는 동료들도 제대로 챙겨줄 수 없었던 때문이겠지요.

노루표 그 형은 별로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형 앞에서 저는 저희 집안 이야기 따위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파할 어머니 아버지조차 없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가 이번에 면회 와서 너무 안타까워 하시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구속된 내 모습 보면 충격받을까봐 면회를 못 오고 금식 기도를 하시고 있다는데 참 죄스러워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종환 시인과 저는 이런 점에서 다르고, 그 다름이 노루표 페인트 형과 견주면 조금 더 뚜렷해지는구나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이 글은 그냥 다르다는 얘기일 뿐이지 그것을 두고 뭐 어떻다고 평가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전교조 조합원 출신인 도종환 시인의 이번 글에는, 전교조 운동이 아니라 다른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거나 한 사람들 얘기는 없군요. 

전교조가 막 결성되던 1989년 어름은 제가 구속돼 있던 1985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학생들이 감옥에 엄청 많이 잡혀들어간 때이기까지 했는데도 말씀입니다. 

'책임 저편의 무책임… 미안하고 아팠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견디며 여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저마다 사연이야 다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겠는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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