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행복하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할까?

김훤주 2010. 12. 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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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돈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목을 매는 그 돈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6일치 <경남도민일보> 5면 광고 "돈이 굴러들어오는 토지 투자 비법" 어쩌고 광고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돈은 무게다. 알려진대로, '돈'이라는 말은 한 돈 두 돈 한 냥 두 냥 헤아리는 무게 단위에서 왔다. 다른 나라서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국의 돈인 파운드(Pound)가 무게를 재는 단위임은 많이 알려져 있다.  

무게는 존재의 표상이다. 존재가 없으면 무게도 없다. 그러니까 돈은 실재하는 존재이다. 존재는 모두 질량이 있다. 질량은 곧 에너지이고, 그래서 돈은 에너지다. 사람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5일치 경남도민일보 5면 광고.


돈을 통해 힘이 작용하면 생산과 소비가 이뤄진다. 생산과 소비는 언제나 공존한다. 오늘 내가 돈을 써서 먹을거리를 챙기지 못하면 내일 내가 일할 노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자본가가 오늘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원자재를 장만하지 않고 기계를 가동하지 않으면 내일 사람들이 돈을 써서 마련해야 할 이런저런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농부도 마찬가지고 상인도 마찬가지고 식당 주인도 마찬가지다. 돈이 들어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도록 하는 바람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돈이 많으면 썩고 적으면 시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갖고 싶어한다. 힘이 싫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힘은, 없어도 탈이지만 많아도 탈이다. 그 힘에 스스로가 짓눌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이 너무 많으면 사람이 썩는다. 나는 졸부들이 끝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얘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갑자기 자기 가진 땅이 비싸져서 거금을 손에 쥐게 된 지주들의 말로가 아름다웠다는 얘기도 별로 듣지 못했다. 

갑자기 많아진 돈에 휘둘려 바람을 피우거나 노름을 하거나 주식 투기를 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욕심으로 사업을 하거나 하다가 망했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사기의 시작은 사기꾼의 농간이지만 그 농간은 사기 당하는 사람의 욕심을 단초로 삼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사기 따위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돈이 너무 적어도 사람이 시든다. 먹어야 하는 음식 먹지 못하고 입어야 하는 옷가지를 갖추지 못하고 깃들일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 

그 흔한 사랑도 하기가 어렵고 가보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며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취미를 즐기지도 못한다.   

썩어도 문드러지고 시들어도 문드러진다 

돈이 아닌 모든 에너지는 밀도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똑같은 공간이라고 상정을 한다면, 에너지는 많은 데서 적은 데로 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돈은 참 별난 에너지다. 흐름이 거꾸로다. 돈은 적은 데서 많은 데로, 많은 데서 더욱 많은 데로, 더욱 많은 데서 더더욱 많은 데로 흐른다.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집적과 집중의 법칙이다. 

돈이 이윤을 낳는 쪽으로 힘을 부리면 사람들은 돈이라 하지 않고 고상하게 '자본(資本, capital)'이라 한다. 자본은 앞에서 말한대로 스스로 소유욕을 가진 살아 있는 생물이 돼서 더욱 많은 돈을 빨아들인다. 

그러니까 경향이나 추세로 볼 때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더 많이 갖게 되고 돈이 더 많은 사람은 돈을 더욱더 많이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돈이 적은 사람은 돈을 더 적게 갖게 되고 돈이 더 적은 사람은 돈을 더욱더 적게 갖게 된다.  

이른바 양극화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는 더욱 가난뱅이가 된다. 사회 전체로 보자면, 한쪽은 썩어 문드러지게 되고 다른 한쪽은 시들어 문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모자라지만 무엇이든 할 수는 있는  

사람들이 마치 아귀다툼이라도 벌이듯이 돈에 미쳐 날뛰지만, 이처럼 조금만 생각해도 돈은 많아도 좋지 않고 적어도 좋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지만 사회 전체를 봐도 나쁘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가장 좋은 돈의 상태는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다. 조금 모자란 듯하면서도 조금만 마음을 내면 자기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있으면 가장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어서,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이 제한 없이 확장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세상 풍토가 더욱 그렇게 부추기고 있다.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붙어 있는 토지 찬가.


가난한 듯하면서도 손을 뻗으면 어지간한 것은 할 수 있는 돈의 보유 상태,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본을 직시하고 세상 이런저런 풍문에 휩쓸리지 않으면 된다. 

사람 사는 근본은 무엇인가? 즐거움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즐거움이라는 답이 나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우연과 우연이 인류 역사만큼 거듭 거듭 거듭한 끝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바로 나의 태어남이고 당신의 태어남이고 우리의 태어남인데, 이 인생을 어떻게 괴로움 따위에게 내어줄 수 있겠는가 싶다. 오지도 않을 앞날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헐값에 팔아먹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 하지 않고 싶다. 

세상 이런저런 풍문은 앞날에 행복은 반드시 오며 그것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한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대학을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내다버리라 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내일의 풍요를 위해 오늘 노동을 초과하라고 한다.  

농부들에게는 내일 엄청난 수확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혀 농협 빚을 내라고 한다. 서비스 따위 자영업자에게도 마찬가지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면 찬란한 내일이 온다며 새벽부터 새벽까지 중노동을 하라고 세상은 말한다.  

바로 이런 풍문에 휘둘리면 즐거움이란 없다. 그렇게 휘둘리는 사람에게 인생의 즐거움은 언제나 무지개일 뿐 팩트는 아니다. 그 즐거움은 언제나 미래에만 있을 뿐 현실에는 있지 않다.  

세상에 휘둘리면 현실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하는 것이다. 직시할 수 있으면 직언(直言)도 할 수 있게 되고 직행(直行)도 할 수 있게 되지 싶다. 그러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나도 돈 많이 갖고 싶다  

한 절간에 갔다가 이렇게 돈을 팍 팍 팍 팍 팍 벌게 해준다는 장면을 봤다. 옛날 같으면 '에이~~' 하고 희떠운 눈길을 한 번 던지고 말았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생각해 봤다. 사람들이 왜 돈을 좋아해서 돈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할까를. 그러면서 왜 부처를 모시는 절간에 와서 돈 벌게 해달라고 빌까도 생각해 봤다. 

이거 아이러니 아니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석가모니 부처로 치자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더 없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석가모니불의 더 없는 깨달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버림조차 버린 위에서 이뤄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버림조차 버린 부처에게 돈을 벌게 해 달라고 빌다니, 돈을 많이 갖게 해달라고 빌다니……. 모든 것을 버리고 이런저런 마음까지 내려놓아 그야말로 이미 무심(無心)해져 버린 부처에게 그렇게 빌다니…….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사람이 돈을 벌 팔자면 돈을 벌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팔자면 그렇지 않게 될 것이다. 부처한테 빈다고 벌어지고 빌지 않는다고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도 돈이 좋다. 돈이 많으면 좋겠다.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마음껏 한 번 가져 보면 좋겠다. ^^
랄랄랄라~~~.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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