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골수 운동권 농민, 농협 조합장에 당선되다

기록하는 사람 2010. 2. 8. 17:03
반응형
지난 3일 창원시 동읍농협 조합장 선거에서 8표차로 현 조합장을 누르고 당선된 김순재(46) 씨.

그는 80년대 대학생(경상대 농대) 시절부터 골수 운동권이었다. 특이하게도 그가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중국 무술 '쿵후' 때문이었다. 무도 서클인 '천심'의 지도관(사범)이었던 그는 학내 폭력서클을 중심으로 한 불량배들이 운동권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 불량배 뒤에는 '권력'이 개입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학내 무도서클 회원들을 규합해 그들과 세 차례 큰 싸움을 치렀다. 캠퍼스 내 폭력서클들은 그렇게 '평정'됐다.

"저는 원래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자유로워야 할 대학 캠퍼스에서 폭력을 동원해 학생들이 할 말을 못하게 한다는 게 참을 수 없었죠."

◇쿵후 때문에 학생운동권이 되다 = 1988년~89년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학내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교도소에도 다녀왔다. 1990년 졸업 후 캠퍼스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강두미(45) 씨와 이른바 '민중결혼식'을 했다. 그가 구속된 직후 열렸던 학내 집회에서 '사모곡'을 불렀던 여학생이었다.

"하하. 민중결혼식이라고요? 사실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한복은 앞으로도 입을 일이 있지만, 한 번 쓰고 말 웨딩드레스를 빌릴 돈도 없었고, 하객들에게 대접할 식사도 교내 식당에서 1인당 700원이면 해결됐거든요. 예식장 구할 돈도 없었고…."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조합장 당선자는 "농민들이 죽을 판인데 조합장만 말타고 가죽 군화 신고 다니면 안된다"고 말했다.


결혼 후 곧바로 고향인 창원시 동읍 판신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와 노지 채소, 하우스를 했다.

"그냥 먹고 살 정도였죠. 그런데 2007년~2008년에는 퇴비공장을 해서 제법 돈을 벌었어요. 소득세만 2000만~3000만 원을 냈으니까. 지금도 열심히 하면 1년에 1억 원 정도는 벌 수 있는데, 내가 빠지면 확 줄어들겠지요. 뭐, 그래도 아이들 학비 대고, 우리 가족 먹고 살 정도는 됩니다."

◇과격한 농민운동가에서 조합장으로 = 그는 또한 농민운동가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부터 창원군농민회 회원이었고, 2003년과 2006년엔 전국농민회 경남도연맹 사무처장을 했다. 그 사이엔 대외협력국장 일을 했고, 2007년부터 지금까지 창원농민회 사무국장이다. 농민 집회와 시위 때마다 그가 있었고, 걸핏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벌금도 적잖이 물었다.

"전과요? 몰라, 총 아홉 개 정도 되나?"

농협 조합장이 되었으니 농민회 사무국장은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만 둬야 한다는 규정이 어디 있어요? 단지 일할 시간이 없어서 그만 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2005년 11월 14일 열린 전농 창원시농민회 기자회견에서 창원시 농업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김순재 씨. /경남도민일보 DB


그는 현재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합장이 당적을 가져선 안 된다는 규정도 없다. 그래서 이번 선거 때 상대쪽으로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에게 질 수야 있나"라는 공격도 많이 받았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죠.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땐 내가 너무 급진 과격한 게 아니라, 우리사회가 너무 수구적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죠."

그런 그가 어쩌다 그토록 어렵다는 조합장에 출마할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 몸으로 싸우기도 불안해지더군요. 그리고 농민운동하면서 다니는 것도 다 헛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제로 농촌엔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문제는 농민들이 일은 열심히 하는데 파는 것(판매)을 잘 못해요. 제가 농촌에 살면서도 발은 좀 넓거든요? 예를 들어 경남도민일보에 들어가서 수박 50덩이는 팔아치울 자신은 있어요. 그런 의논을 하던 중에 한 사람이 '그런 걸 하는 게 농협이다. 농협장에 한 번 출마해봐라'고 하더군요."

◇그가 내건 두 가지 공약 =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공약을 내걸었다. 첫째, 농협의 비정규직(12명)을 모두 정규직화하고, 효율성 있는 조직으로 바꾸겠다. 둘째, 농산물 판매방식을 바꿔 소량농산물은 직거래로 하고, 벼나 단감은 사실상 '공동생산, 공동판매' 방식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농협 조합원 입장에선 잘 생산하여 잘 팔면 되는 거거든요. 복지라든지 다른 공약들도 있지만, 그런 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고 그게 핵심이죠."

그가 생각하는 농협 조직의 문제점과 이를 어떻게 개혁해 나갈 지 물었다.

"사실 조합이라는 것, 농업협동조합이든, 노동조합이든 조합이라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한 거잖아요. 힘있는 놈들은 조합을 안 해요. 그들은 협회나 협의회 같은 걸 하죠. 정부가 조합에 지원해주는 것도 힘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건데, 문제는 그런 조합이 힘없는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많은 걸 조합원에게 공개하지 않고 감추는 게 많아요."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 당선자


그러나 그런 농협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농협 조직 안에 7000만 원 이상 연봉을 가져가는 사람만 1만 명 이상이다. 그말까지만 하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무능한 건 이해할 수 있어도 부패한 건 용서할 수 없다 = 동읍농협은 조합원이 2200여 명이고, 조합장 연봉도 8800만 원에 이른다. 판공비도 따로 있다. 승용차도 나온다. 임기는 4년이다. 이 정도 자리라면 그도 변질할 가능성은 없을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러면 죽어야죠. 조합장은 그야말로 입법·사법·행정 3권을 다 쥐고 있는 막강한 자리입니다. 확 바꿀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죽을 판인데, 조합장만 말타고 가죽 군화 신고 다니면 안 되죠. 그래서 아내에겐 내 월급엔 한 푼도 기대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승용차도 말 그대로 업무차량으로 돌리고, 제 차를 탈 겁니다. 무능한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부패한 것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제 철칙입니다."

선거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유혹이 있었다. 막판에는 3000만 원만 쓰면 확실히 된다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원칙이 있었다.

"오히려 그런 권유를 설득하는 게 어려웠어요. 10만~20만 원짜리 봉투 만들어 돌리면 150표 차로 이긴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조합원에게 금전을 살포하는 것은 조합원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럴 바에야 조합장 안하고 포기하겠다고 했죠."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 당선자


결국 그는 8표의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나이 60이 넘은 형님들이 순찰조를 짜서 상대후보의 돈 살포를 감시하더군요. 그런 열성 조합원들 덕분에 이겼지요. 하지만 우리쪽이 실수하면 무조건 진다는 생각으로 선거를 치뤘죠. 선거 이야기를 하자면 두 세 시간 정도는 풀어놓을 수 있어요."

그의 임기는 3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당선 소감을 물었다.

"운동권 출신이 대중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저 새끼 저거, 데모나 하던 놈…, 되고 보니 별 수 없네' 이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아래 동영상은 구자환 님이 블로그에 올린 '내 기억 속의 농민운동가 김순재'라는 글에 올라있는 것입니다. 양해를 얻어 퍼왔는데, 2005년 한 농민집회에서 울면서 절규하는 김순재 씨의 모습에 가슴이 찡하네요.


사이판 총기난사 피해자 박재형 씨에게 희망을 주세요. ☜클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