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여행사를 통해 해외여행을 갔다가 현지의 무장괴한으로부터 총기테러를 당했다면 과연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위험한 곳으로 데려간 여행사일까, 치안을 소홀히 한 현지 정부일까? 아니면 자국민 보호의무가 있는 한국정부일까? 정답은 '아무도 책임지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마산 중앙동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형을 도와 과학강사로 일해왔던 박재형(39) 씨. 그는 4년 전부터 한국 나이 마흔이 되는 2009년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목표로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 곗돈을 부어왔다.
마침내 올해 11월 19일, 가르치던 아이들의 수능시험도 끝난 시점이어서 느긋하게 사이판으로 가는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같은 학원에서 수학강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와는 신혼여행 후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마흔 기념 부부동반 해외여행 첫 도착지서 무장괴한에 피격
박재형 씨 부부가 아들(둘째)의 돌잔치를 하고 있는 모습. 그러나 재형 씨는 이번 사건으로 평생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됐다.
사이판 현지 시간으로 새벽 3시 호텔에 도착한 재형 씨 일행은 20일 오전 10시 여행사 가이드의 안내로 첫 관광지인 만세절벽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전몰자들의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그가 버스에서 내려 바로 보이는 벤치에 막 앉았을 때였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처음엔 전쟁과 관련된 관광지여서 폭죽이나 총소리 효과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곳곳에서 파편이 튀면서 몸 어디선가 통증이 전해왔다.
순간 눈 앞에 서 있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함께 엎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내를 향해 발을 떼는 순간 등허리에 뜨거움을 느끼며 곧바로 쓰러졌다. 무장괴한의 총탄이 그의 척추를 관통한 것이었다.
현지 경찰의 조사 결과 무장괴한은 사이판의 실탄사격장 종업원으로 일하던 중국계 30대였으며, 1년 가량 임금을 받지 못하자 사격장에서 탈취한 총기와 실탄으로 주인 부부를 살해한 후 관광객들에게도 총기를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형 씨 외에도 5명의 한국 관광객이 이날 총기난사 사건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 중 재형 씨가 가장 심각했다. 그러나 사이판 현지에는 병원이 한 곳밖에 없었으며, 수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 의사나 수술장비도 없을 정도로 의료시설이 열악했다.
열악한 현지 의료수준 생사고비서 천신만고 한국행
현지의 비전공의가 응급수술을 하긴 했으나, 장기가 부어 절개한 복부를 봉합도 못한 채 사경을 헤메고 있던 재형 씨를 한국으로 데려와 생명이나마 건질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형인 박형돈(43) 씨의 역할이 컸다.
"아마 거기서 계속 치료를 받았다면 동생은 죽었을 겁니다. 무조건 본국으로 후송해달라고 현지 영사와 한인회장, 관광청에 강력히 요구했죠. 그러나 항공기를 운항하고 있는 아시아나에서 위험한 상태의 환자를 태워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쪽 사람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라도 영리단체인 인터내셔널SOS에 알아보라는 겁니다. 개인 비용으로 항공기를 대절하라는 거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한국의 언론을 떠올렸다. "24시간 방송 채널인 YTN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랬더니 동영상을 찍어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휴대폰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는 동생을 찍어 보냈죠. 그 영상이 밤새도록 YTN 뉴스에 방송되자 그제서야 이 사건의 여파로 관광객 감소를 우려한 사이판 정부가 괌에 있는 특별기를 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는 특별기 제공이 결정되자 3시간 먼저 민항기편으로 서울에 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항공사 임직원들이 저를 에워싸고 언론과 접촉을 막더군요. 여행사와 항공사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저의 언론 접촉을 막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뒤이어 특별기편으로 도착한 동생 재형 씨는 서울대병원에서 일곱 시간에 걸친 첫 수술을 받았다. 이후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지만, 아직도 파편을 다 제거하진 못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치료가 잘 되더라도 평생 하반신 마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조동맥으로 연결한 대동맥의 경우, 여전히 감염 위험성이 남아 생명도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
여행사-사이판정부-한국정부 모두들 "나몰라라"
아내와 네 살난 딸, 두살 아들의 가장으로 살아온 재형 씨는 이로써 가족을 부양하기는 커녕 자신의 몸도 가눌 수 없고 생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의 아내 또한 직장을 그만 두고 평생 남편의 수발을 들며 살아야 할 처지다.
그동안 모은 재산이라고 해봐야 마산의 산복도로 변에 있는 낡은 18평 아파트가 전부라고 한다. 당장 문제는 어마어마한 치료비 부담이다.
"의료보험을 적용해도 1주일 병원비가 1000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여행자 보험에서 나오는 병원비는 300만 원이 고작이라고 합니다."
재형 씨의 형 박형돈 씨가 사건 이후 여행사와 사이판 정부, 한국정부의 태도를 성토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치료 결과 60% 이상 장애 판정이 날 경우 약 4000~5000만 원의 보험금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그걸로 치료비라도 댈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듣고 사이판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사 간부가 치료비는 모두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말을 바꾸더군요. 내부 법률팀 자문 결과 법적인 책임이 없다면서, 오히려 언론이나 인터넷에 알려 회사에 피해가 올 경우 소송도 고려하겠다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더군요."
사이판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범죄피해자에 대한 보상제도가 없고 선례도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사이판 정부를 상대로 국제소송도 해볼 순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서민이 그런 소송을 진행하기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가족들이 더 서운해 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태도다.
형 박형돈 씨는 한국 정부에 대해 "국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라도 좀 들었으면 좋겠다"며 서러워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와 통화를 했는데, '정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언론이나 인터넷에 호소해봐라'고 하더군요. 자기 자식이 밖에 나가서 깡패한테 맞고 왔는데, 부모가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그 사람에게 따지는 게 아니라, 자식한테 그 깡패에게 찾아가 병원비 달라고 해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는 무엇보다 부산의 사격장 화재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 정부나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대응방식에 분통을 터뜨렸다.
"부산 사격장 화재사고에는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가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겼고요. 그런데 우리 국민이 외국에서 당한 피해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인터넷에 호소해봐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게 정부가 할 말입니까?"
우리 국민이 외국에서 당한 피해에 대해서는 언론이나 인터넷에 호소해봐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게 정부가 할 말입니까?
심지어 그는 "외교통상부 관계자에게 '정부가 그렇게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언론이나 인터넷에 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는 답변을 들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결국 다른 방법은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saipanning)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이판 현지 관광청에 보내는 영문 편지를 올려놓고 한국 네티즌들의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 카페에는 그를 간병하고 있는 아내의 일기도 매일 올라오고 있다. 그 일기 중 두 구절을 소개한다.
"어제 저녁 면회 내내 그가 울었습니다. 수면상태에 있는 그가 흘리는 눈물은 무의식이라 생각했고 그동안 잠깐씩 보았습니다만, 어제 저녁 면회시간 30분 내내 흘리던 그의 눈물이 아직도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이 나라에서 일반 서민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없고 초라하고 작은 존재인지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 지 정말 막막합니다. 제발… 간절하게 조언과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다음 아고라 청원 : '사이판 총격피해 한국인에게 대책을' ☜서명에 참여해주세요.
※사이판 : 북마리아나관광청 자유게시판 ☜한국인으로서 항의글을 남겨주세요.
아래는 현재 이 사건의 해결에 힘을 보태고 있는 블로거와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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