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마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명단 공개합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1. 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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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민간인학살 사건 희생자 명단에 자신의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전화가 가끔 걸려온다.

올들어 마산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지고, 이후 결성된 마산유족회(회장 노치수)가 48년 만의 합동위령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확인해 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명단을 공유하기 위해 블로그에 올려놓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올리는 명단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마산매일신문>이 당시 유족회로부터 받아 7월 23일자에 보도한 것이다. 이 명단이 실린 신문스크랩 덕분에 이번 진실규명 결정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분이 희생자로 확인될 수 있었다.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음.

물론 이 명단이 전체 희생자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족회가 짧은 시일동안 신고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일뿐이다. 참고로 <마산매일신문>은 1960년 3·15마산의거 직후 주간지였던 '마산타임스'가 일간으로 전환하면서 조간과 석간 하루에 두 번 발행한 신문이었는데, 1961년 5·16쿠데타 이후 폐간되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나 다시 결성된 마산유족회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와 유족회 자체 취합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10월 16일 합동위령제 때 모실 신위 405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도 함께 공개한다. 앞으로 이 명단은 계속 추가될 것이다. 당시 알려진 마산지역 피학살자 숫자가 1681명 또는 200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405명은 약 4분의 1에 불과하다.


아울러 내가 2001년 6월 19일자 <경남도민일보>에 보도한 기사 전문을 함께 싣는다. 이를 통해 당시 마산 민간인학살의 개요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은 역시 '기록매체'였다

신문은 역시 '기록매체'였다. 군사정권이 증거인멸을 위해 모든 기록을 폐기했으나, 이미 대중에게 배포된 신문까지 회수해 폐기할 순 없었던 것이다.

61년 5·16정권은 쿠데타 성공과 함께 4.19이후 전국으로 번지고 있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착수했다. 유족회를 강제해산시켰고 간부들을 모두 구속했으며, 조사기록을 모두 압수했다. 심지어 유족들이 발굴해 안장한 희생자 합동묘까지 파헤쳐 유골을 여기저기 분산시켜버렸다. 또 유족회가 세운 추모비도 산산조각을 내거나 정으로 글자를 쪼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부관참시. 그랬다. 그야말로 부관참시였다.

쿠데타정권은 도대체 왜 이토록 철저히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을 은폐하려 했을까. 재미학자인 이도영 박사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5·16 쿠데타는 4월 혁명 이후 양민학살사건의 전모가 조사되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 있던 육본 정보국과 내무부 치안국이 이같은 심각한 상황을 뒤집어엎은 한판 승부였다." (5·16쿠데타와 양민학살, 월간 <말> 2001년 5월호)

즉 5.16 쿠데타의 주모자인 장도영.박정희.김종필 등이 모두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정보국 출신이라는 것이다. 또 해병대 출신인 김동하(만주군 2기·제주도 주둔 해병대 사령부 제주읍 부대장)·김윤근·김두찬(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등도 민간인학살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게 이도영 박사의 주장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쿠데타 성공 후 첫 작업으로 유족회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와 증거인멸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기록이 멸실된 가운데서도 신문보도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 예컨대 모두 학살된 대구형무소 정치범 1402명의 명단은 <대구매일> 60년 6월 7일자에 수록돼 다행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마산매일신문의 보도내용

또 그동안 국회 진상조사특위 현지 증언청취속기록을 통해 윤곽이 드러난 마산의 민간인학살 희생자 명단도 당시 <마산매일신문>에 수록돼 있음이 이번에 밝혀진 것이다.

60년 7월 23일자 <마산매일신문>은 '양민학살사건 백일하에 폭로'하는 주제목과 '독재정권의 또하나의 만행'이라는 부제목 아래 유족들의 고발장에 포함된 피고발인(학살 가해자) 명단과 학살의 실상을 '특무대(CIC)의 범행'과 '경찰의 범행'으로 나눠 싣고 있다.

이 신문이 보도한 고발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기 4283년(1950년-기자 주) 5월부터 동년 9월까지에 이르러 무고한 양민을 보도연맹 운운하고 경찰 유치장과 마산형무소에다 수감한 뒤에 문서상으로는 석방한다고 가장하고 20.30명씩 집단적으로 총살 또는 수장을 하였다. 천인공노할 사실을 당해 상부에는 공비를 사살한 것처럼 보고한 나머지 모두 암매장해버렸다는 것이며, 동 유족회에서는 엄벌에 처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앞으로 당시 암매장한 수개 장소를 발견하여 합장과 아울러 위령제를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기사는 특무대의 만행으로 이어진다.

△4283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 동년 7월 24일부터 9월초순경까지에 이르러 주로 야음을 이용하여 '추럭'과 '뻐스'에 싣고 산골에서 총살한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

경찰의 범행은 다음과 같다.

△4283년 5월 초순부터 동년 9월말까지 그 당시 사찰계장 정도환 및 사찰계형사 노장현, 동 형사 황임규 등과 공모결탁하여 윤윤오 외 180명(성명불상)의 양민을 좌익사상소지자라고 하여 마산경찰서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여 '빨갱이'로 조작할 목적으로 사실없는 자백을 강요하면서 가혹한 고문을 했는가 하면 석방해준다는 구실로서 해당 가족에게 금품을 강요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에 30만원을 받고 석방된 사람도 있었으며, 금년 7월 초순경부터 동년 9월말일까지 수회에 걸쳐 학살을 하게 되었는데 경찰서류를 인명부에는 석방한 것으로 기록한 나머지 △7월 8일=8명을 '추럭'에 싣고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안데미골'에서 권총과 '칼빙'총으로 학살한 후 암매장 △7월 중순경=30명을 마산시 봉곡리 수원지 입구 산골에서 총살 암매장 △8월 초순경=12명을 시내 월영동 뒷산 '요색고개'에서 총살 암매장 △9월 7일=윤윤오 외 4명을 창원면 남산에서 총살 암매장 △9월 중순경=30명을 창원고개에서 총살 암매장 △9월 하순경=30명을 창원군 구산면 산골에서 총살 암매장.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그동안 특무대가 모든 학살을 지휘하고 경찰은 보조적 역할만 했다는 추측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족회는 "(학살에 가담한) 민간인들의 명단도 입수하고 있으나 도피할 우려와 사전누설을 막기 위해 앞으로 검사의 증인심문시에 진술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우익단체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와 민보단·국민회 등의 개입여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01. 6. 19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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