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친일인명사전, 박정희·장지연이 고맙다

기록하는 사람 2009. 11. 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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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인명편, 전3권) 편찬이 완료되었다. 8일 숙명여대 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민보고대회는 갑작스런 장소대관 거부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근 효창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진행됐다.

연합뉴스와 뉴시스 등에 뜬 사진을 보니 오히려 백범 묘소가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의 자리로 훨씬 어울렸다. 백범 선생 묘소에 책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니, 훨씬 모양새가 났다. 현장에 있던 지인과 민족문제연구소 간부들도 '차라리 잘 됐다'며 이구동성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서 막판까지 국민의 관심을 끌게 해줬던 것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의 유족들이었다. 유족들이 법원에 친일인명사전 게재 및 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오히려 이날 국민보고대회가 더 큰 국민적 관심 속에 열릴 수 있었다.

갑작스런 장소 대관 거부로 보고대회는 백범 묘소로 옮겨 진행됐다.


어쨌든 법원은 지난 6일 이들의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 선생을 게재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기 부족하다"며 "표현행위의 사전금지가 허용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기각한 날, 11월 30일로 활동기간이 만료되는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 위원장 성대경)은 <친일반민족행위 관계 사료집>(전16권)을 완간했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6일 발간한 사료집. 여기에도 장지연의 친일시문이 다수 실려 있다.


이 사료집 13권에는 장지연의 대표적인 친일시문 10편과 경남일보에 실린 친일 기사 7편이 실렸다. 반민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장지연이 빠지긴 했지만, 그의 친일행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이 사료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막판까지 논란을 빚은 장지연의 친일행적에 대해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6페이지를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200자 원고지로 무려 70매가 넘는 분량이다.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장지연 張志淵│1864∼1921, 언론인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초명은 장지윤(張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다.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중략)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承訓郞)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閔泳綺)·윤치호(尹致昊)·이달용(李達鎔) 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한 일로 다음 날인 21일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일로 11월 20일자 <황성신문>이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중략)

1909년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11년 10월 진주로 이사했다. (중략)

주필로 있을 때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 일본 천황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1면 제호의 위와 옆에 X로 엇갈린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장식하고, 아래에는 '봉축천장절(奉祝天長節)'이라 표기해 이를 기념했다. 다음 해인 1911년 11월 2일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장식했는데, 2단을 합친 전체 크기에 '축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漢詩)를 게재했다. 천장절 기념 한시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재직하던 시기에 무기명으로 게재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 바다 일본에서 해가 떠오르니 태양이 빛나는구나 / 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 / 보위에 오르신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 /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 / 뭇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 /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년이 되어 영원하리라."

<경남일보>는 1911년 11월 3일 개최되는 천장절 경축행사를 위해 10월 27일부터 본문에 고정란을 만들어 '천장절 축하 의절(儀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매일 게재했다. <경남일보>가 주관하는 천장절 경축행사도 열렸는데, 진주군 수정봉(水晶峰) 정상에서 천 가지의 등화로 봉장한 '축 천장절'이란 네 글자가 밤을 밝히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1913년 7∼8월경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했다. (중략)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文士)로 널리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략) 전 편집국장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는 경성일보사 2대 사장을 지낸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 1914.8∼1918.6.재직)가 재직 당시 "언론의 웅(雄)으로서 이름이 높던 장지연 씨를 회유하느라고" 고심이 많았음을 밝혔고, 전 편집국장 방태영(方台榮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은 자신이 장지연을 매일신보사로 영입했음을 밝혔다.

장지연은 <매일신보> 1915년 3월 14일자 '기창만필(羈窓漫筆)'(3)에서 "평소의 뜻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바라는 것 아니었는데, 그대의 권유하는 뜻에 감격하여 종유(從游)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아베가 자신을 알아주고 권유한 데 감격해 그와 사귀게 되었음을 밝혔다. (중략)

1914년 12월 열린 불교진흥회 설립총회에서 간사에 선출되었다. 불교진흥회는 친일 승려 이회광(李晦光)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설립취지에서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우리 동포로 하여금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불교진흥회를 발기 한다"라고 하여 설립당시부터 뚜렷한 친일색채를 표방해 회주(會主) 이회광은 많은 승려들의 비난을 받았다. 1917년 2월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로 개편되었다. 1915년 7월에는 불교진흥회가 개최한 천도식(薦度式)에 사용된 제문을 지었다. <매일신보> 7월 6일자에 불교진흥회 간사 장지연의 제문과 함께 중추원 고문 조중응(趙重應) 자작이 지은 제문이 실렸다.

1914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 '사고(社告)'와 함께 같은 날짜 1면에 숭양산인 장지연의 실명으로 '고재만필(古齋漫筆) - 여시관(如是觀)'의 연재가 시작됐다. 이후 1918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고,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되었다.

1910년대의 <매일신보>는 식민정책과 관련한 각종 법령·제도를 일제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식민주의적 관점을 관철하고 있었다.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근대성을 내세우거나, 동화정책(同化政策) 선전을 제일의 목적으로, 조선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한편 식민지 개발정책을 '시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중략)

식민지가 된 원인을 단체성이 없는 조선인의 민족성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말을 빌어 인용하면서 같은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1915년 4월 3일의 '신무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이해 같은 날짜 <매일신보>에 일본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면서 "신무는 영웅의 신명(神明)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해내(海內)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皇統)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萬國)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특별히 이 글을 지어 바친다고 밝혔다. (중략)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 천왕 다이쇼(大正)를 만나러 간 것에 대해서는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라고 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동생인 영친왕 이은(李垠)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일본 황실과의 결혼 내정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숨겨진 의도는 영친왕과 일본 황실의 결합을 통해 이왕가의 권위를 낮추어 식민통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한 것이다.

한편 1916년 12월 10일자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환영하는 한시가 게재되었다.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

하세가와는 청일전쟁 때의 공적으로 남작에 올랐고,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내면서 이토와 함께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자 임시 통감대리를 지냈다.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를 환영하면서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표현했다.

1917년 10월 문예구락부가 주최하는 문예대회 고시원(考試員)으로 참여했다. 문예구락부(文藝俱樂部 : 총재 후작 朴泳孝)는 1911년 7월 한문의 폐지에서 유래되는 위기감과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직되었다. 문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의(時宜)에 관계된 것을 제거 한다"고 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금지했다.

1918년 12월 1일자에 실린 '마산에 신조(新造)한 석탑'이 <매일신보>에서 확인되는 마지막 글이다. 1919년 4월 양산(梁山)을 유람했으며,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져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하다가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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