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박정희가 해직시킨 교사 3008명 아직도…

기록하는 사람 2009. 11. 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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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두환 등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뭘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정권 찬탈 음모에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들, 즉 이른바 '운동권'을 싸그리 잡아들여 조지는 것이다. 그걸 일컬어 이른바 '예비검속'이라고 한다. 법적 근거도 없고 구속영장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그건 명백한 '불법 구금'이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5·16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바로 전국의 '운동권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일이었다.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그들은 이틀 뒤인 18일부터 교원노조, 양민피학살자유족회, 민족통일학생연맹,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등 사회단체는 물론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등 진보정당 간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예비검속된 사람만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1960년 마산에서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요즘은 전국단위 사회단체가 모두 서울에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방에 본부를 두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도 5.16쿠데타 직후 연행됐다. @김주완


그러나 이같은 쿠데타세력의 불법행위는 수십년 동안 어둠 속에 뭍혀 있었다.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이나 사과는 물론 사실 규명조차 없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에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 유족으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서를 입수, 처음으로 국가기관이 인정한 당시 교원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탄압 실태를 고발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결성된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교원노조) 간부들도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부터 속속 연행됐다. 교원노조 경남연합회 이종석 위원장은 이렇게 증언한다.

"1961년 5·16직후인 5월 18일 부산시 중구 동광동 경남교원노조연합회 사무실 입구에서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 형사 2명에 의해 체포이유도 모른체 연행된 후 …… 부산시 전포동 소재 육군형무소에 이감, 수감되었으며 교원노조 활동을 한 교사들 중에는 부산시 지역에서 200여 명, 경남 지역에서 400여 명 가량이 체포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체포된 사람들은 …… 합수부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법적 근거나 구속영장도 없이 무차별 연행
 
당시 김해농고 교사였던 윤복영 씨도 이렇게 증언했다.

"…… 수업을 중단하고 교무실에 들어가니 이름을 모르는 김해경찰서 정보과 형사 1명이 임의 동행을 요구하여 동행에 불응하자 '간단한 조사만 할 것이니 협조해달라'고 하여 당시 김해경찰서로 연행되어 교원노조 설립에 관한 경위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으며, 조사가 끝난 뒤 학교로 보내달라고 얘기하였으나 경찰은 당일 오후 2시경 유치장에 수감하였습니다. 제가 수감되는 날, 김해경찰서 유치장에는 김해중등교원노조연합회 위원장 서광수, 선전부장 조종택, 김해교원노조초등연합회 위원장 강문중, 부위원장 윤갑철, 사회대중당 김해군위원장 한대섭, 김해피학살자유족회 김상태가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조사 과정에서 엄청난 폭행과 고문을 통해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합수부 조사과정에서 잠 안재우기를 강요당하였습니다. 2~3명의 수사관이 교대로 들어와서 잠을 자려면 깨우고 괴롭혔는데 열흘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경찰과 방첩대 수사관은 '이놈이 빨갱이다, 네가 교원노조의 수괴다'라고 하며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고 주먹으로 얼굴(뺨)을 때리곤 하였습니다. 취조하는 형사가 요구하는대로 진술을 안 하면 '이놈 빨갱이 제대로 말을 안 하네'라고 하면서 …… 북한의 지령을 받은 사실과 지시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윽박실렀습니다." (이종석의 증언)


진실규명 결정문 속의 '전국 시도별 교원노조 해직자 수'.


이렇게 잡혀가 고초를 겪은 교사들 외에도 무려 3008명의 교사가 단지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사실도 이번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확인됐다. 특히 지역별로는 경남(현재의 부산·울산시 포함)이 763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경북(현재의 대구시 포함)이 503명, 경기지역이 484명이었다. 3008명 중 초등은 800개 학교에서 1405명, 중등교원은 666개 학교에서 1603명이 해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 중 상당수는 불법구금 상태로 수개월씩 고초를 당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이른바 '혁명재판'에 회부되 징역 3~12년의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경남도지사의 징계지시 극비 공문 발견
 
이번 조사 과정에서 진실화해위는 당시 쿠데타 세력이 법적 근거도 없이 교원노조원들을 징계하라고 지시한 공문도 곳곳에서 찾아냈다. 당시 경남도지사가 각 시군구 교육감과 중고등학교장에게 내려보낸 '극비' 공문(1961년 6월 21일)도 부산전자고등학교(현 부산원예고)에서 발굴됐다. 다음은 극비 공문의 내용이다.

"교원들이 교원노동조합에 가입하므로써 학원의 혼란을 조성하여 교육에 미친 바 영향이 지대하므로 이의 반성을 촉구시킨 바 있으나 최근 정보에 의하면 5·16혁명 후에도 교조에서 탈퇴치 않고 오히려 혁명에 대하여는 극히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로 정세를 관망하고 있다는 것은 반공교육의 철저를 기하려는 이 때 교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교조에 가입된 교원들의 정리를 위하여 귀 시·구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중고등학교에 있어서는 학교장이 다음 요령에 의하여 심사한 후 7월 5일까지 보고할 것."


이 공문은 심사위원회 구성을 교육감과 학무과장, 서무과장, 장학사, 중심학교 교장, 일반인 1명으로 하도록 하는 한편 A, B, C의 3급으로 심사하되 'A급은 구속된 자 또는 처벌 받은 자, B급은 노조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한 자, C급은 외부의 권유에 못이겨 가담되었으나 전혀 활동을 하지 않은 자'로 분류토록 하고 있다.


처리 방법은 'A·B급은 심사하여 파면한다', 'C급은 교장 또는 확실한 사람의 보증을 받고 계속 근무토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3008명 해직교사 중 경남만 763명
 
이렇게 강제해직된 교사들과 그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해농고에서 해직된 윤복영 교사의 경우 생계를 위해 부인과 함께 노점상을 하기도 했다. 이후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아내는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고생하다가 담낭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김해경찰서에서 석방된 직후인 1961년 7월 중순경 학교에 출근하여보니 지수성 교장선생님이 '원에 의하여 그 직을 면함'이라고 적힌 저의 김해농고 인사기록부를 보여주며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마라'고 하였으며, 이 때 저는 교장선생님에게 '나는 사직서를 쓴 적도 없고 그런 의사를 표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반박하니 교장선생님은 '나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군부의 지시로 경상남도 학무국 학무과에서 이렇게 명령(사령장)을 전달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애기하였고, 이에 대하여 자신은 '교사를 천직으로 하여 9명의 식솔을 데리고 살아가는 가장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떻게 의원면직을 신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항의해보았으나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거나 불법구금, 또는 강제해직당했던 교사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사과와 재심 등 법률적 구제,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게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번에 밝혀진 것처럼 80·90년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직교사들의 경우 불완전하게나마 복직이라도 되었지만,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해직된 3000여 명의 교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제나 명예회복 조치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 진실규명 결정으로 당시 해직됐던 교사와 그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8년이 지난 지금도 교사들이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고발되거나 대량 징계위기에 놓여 있다. 이미 현 정권들어 해직된 교사도 상당수에 이른다. 용산참사 현장의 농성 철거민들이 오히려 유죄판결을 받았다. 과거사 진실규명 작업도 곧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바로 잡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관련 글 : 검사와 재판장이 치고받고 싸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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