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잊지 말아야 할 악질 경찰 2명 공개합니다

두 악질 경찰과 두 독립운동가 4·19혁명 55주년이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 때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라는 아주 악질 헌병보조원이 있었다. 부산헌병대에서 신상묵(신기남 전 국회의원의 부친)과 함께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기로 유명했다. 다음은 해방직후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한 대목이다. “곤봉, 죽봉, 죽검 등으로 난타하고 2, 3일간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고, 두레박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담구거나 이른 아침에 방화용 수조의 꽁꽁 언 물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깬 후 결박한 채로 얼음물에 앉히고는 머리부터 빙수를 내리붓고는 거꾸로 매달아 전신을 얼음굴에 처박곤 했습니다. 이로써 실신하면 부채질이..

경남정대연, 기록없는 역사는 복원하기 어렵다

지난 10일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이지영 전임연구원(정치학박사)이 나를 찾아왔다. 1997년부터 약 5년 간 활동했던 '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경남정대연)'을 취재해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성가족부 프로젝트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는(했던) 시민운동의 흐름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창원 이경희 선생이 나를 꼭 만나보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경남정대연 창립에서부터 해산까지 깊이 관여했던 나를 찾아온 건 나름 번지수를 잘 짚은 것이지만, 기록해두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만만찮았다. 물음에 나름 성실히 대답하고, 당시 신문기사들도 찾아 복사해주었지만 체계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라 못내 아쉬웠다. 그를 보낸 후 집에 가서 당시 경남정대연 관련 기록이 있..

민간인학살 64년, 위령제는 7차인 까닭

2014년 제64주기 제7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이 7월 5일 오후 1시부터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천주교 마산교구청 1층 강당에서 열렸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창원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는 23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717명 정도로 확인했고, 그 중에서도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358명이었다. 그 분들이 학살된 지는 64년이 지났는데, 위령제는 왜 7차일까? 이날 정동화 부회장이 읽은 경과보고는 이렇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09년 2월 18일 마산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희생자 63명의 진실규명 결정 후 동년 4월 25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김주완 부장의 주선으로 김도곤, 황양순, 노치수, 송시섭, 송수섭, 권영철, 배기현, 김재환, 김정임,..

영세중립통일추진위, 누가 이들을 아시나요?

해방 후 마산에서 영세중립통일운동을 하다 5·16쿠데타 정권하에서 옥고를 치른 고 김문갑(1909~2004년·사진) 씨와 고 김성립(1917~1982년) 씨가 52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형사부(부장판사 이흥구)는 고 김문갑 씨의 아들(62)과 고 김성립 씨의 아들(66)이 재심청구한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마산 통일운동가 52년 만에 명예 회복…고 김문갑·김성립 씨 무죄 선고 제가 2009년 10월 "5·16쿠데타 직후 억울하게 죽거나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이 마침내 피해구제를 받을 길이 열렸다"는 기사를 쓴 지 햇수로 4년 만에 이뤄진 결실이네요.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는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

경남지사 출마했던 이달곤, 청와대가 고향

이태 전인 2010년 경남 도지사 선거에 나섰다 김두관 선수한테 졌던 이달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미국 이름난 대학교도 나왔다고 선거 과정에서 떠들어댔던 사람입니다. 출마 직전까지 행정안전부 장관을 맡아 마산·창원·진해 행정 통합을 강행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주민 의견에 반한 행정 통합으로 통합 창원시는 갈등과 대립으로 지금껏 분란을 겪고 있습니다. 1. 이태 전 경남에 남겠다 했던 이달곤 어제오늘 사이 경남도민일보 인터넷 신문을 검색하다가 이달곤 관련 기사가 얻어걸렸습니다. 2010년 3월 8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한 도지사선거 출마 선언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이는 선거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기자들 물음에 "서울로 가지 않고 경남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을..

제주 4.3 역사문화 아카데미 신청하세요

제주 4.3평화재단에서 의미있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네요. 제주 4.3 역사문화 아카데미인데요. 총 16강좌 중 저도 한 강의를 맡았습니다. 4.3사건이 있었던 제주도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이 민간인 집단학살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우리 경남도 지역 특성에 맞게 이런 아카데미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민해봐야 할 과제입니다. 어쨌거나 제주도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의미있는 아카데미가 될 것 같습니다. 4월 6일까지 수강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제주 4.3 역사문화 아카데미 ○ 현대사의 아픔인 4·3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화해와 상생으로 적극 전파하여 역사인식 제고 ○ 비극적인 역사가 해원 과정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4·3교육을 통한 전국화 도모 ○ 기 간..

이들 유족에게 이승만은 학살자일뿐이었다

51년 전 피학살자유족회 선언문을 보니...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물러나자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가족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기를 틈타 사회불안 요소 제거 차원에서 재판도 없이 산골짜기에서 총살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한 사람은 최소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피학살자 유족들은 10여 년간 공포정치에 억눌려 피해 사실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그제서야 각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다. 4·19 직후 경상도에서 먼저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그해 10월 20일 서울에서 전국유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

3.1절을 '독립항쟁일'로 바꿔야 할 까닭

대학 시절 잘못된 역사 용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던 은사가 있었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쳤던 려증동 교수였는데, 그 분은 '한일합방'이란 말부터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교과서에 '한일합방'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한국과 일본이 나라를 합친 날'이라는 뜻인데,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날을 그렇게 표현할 순 없다는 게 그 분의 주장이었다. 다행히 지금 '한일합방' 대신 '경술국치'라는 말이 두루 쓰이게 된 것도 그 분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3.1절도 그렇다. 그분은 '3.1운동'이라는 말 자체부터 문제라고 했다. 무릇 역사 용어나 국경일 또는 국가기념일의 이름은 그 뜻을 온전히 담고 있어야 하는데, 삼 쩜 일 운동, 영어로 번역해봐도 ..

진실화해위원회 직원들의 마지막 호소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이 31일을 끝으로 공식 종료되는군요. 1999년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왔던 저로서도 참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착잡한 이유는 이번 활동 종료가 위원회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은 갈수록 위축되어 왔고, 급기야 뉴라이트 계열의 위원들이 대거 자리를 차지하면서 오히려 진실이 축소 또는 왜곡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제 메일로 진실화해위원회 공무원직장협의회(대표 임채도)의 편지가 들어왔군요.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의 기자회견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침울해졌습니다. ..

11년만에 밝혀진 미군의 곡안리 학살

어제(14일)는 참 기분좋은 날이었다. 기자로서 정말 뿌듯한 날이기도 했다. 1999년 10월 4일 처음으로 '곡안리 재실(齋室)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후, 약 11년만에 한국정부 차원의 공식 진실규명 결정이 난 사실을 다시 우리 신문지면으로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산 곡안리 학살 '진실' 확인 : 경남도민일보) 최초 보도에서 마무리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신문이 둘 다 단독보도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1999년 5월 11일 창간된 경남도민일보의 창간기획으로 지역현대사를 발굴해 보도하는 '지역사 다시읽기'라는 기획시리즈 기사를 20회째 연재 중이었다. 그 해 여름부터는 1950년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내보내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