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울사람들은 왜 꼭 저런 말을 쓸까?

기록하는 사람 2009. 6. 1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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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기자인데다 시사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전국에 아는 사람이 꽤 된다. 강의나 토론회, 또는 각종 회의를 통해 그런 분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서울사람들만이 가진 독특한 말버릇을 알게 됐다.

서울사람이 마산에 와 있을 때 휴대전화를 받으면 한결같이 "나 지금 지방에 내려와 있거든"이라고 한다. 광주나 부산이나 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여기 마산인데"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지방'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반면 마산이나 광주·부산·대전사람은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나 역시 다른 지역에서 전화를 받으면 "여기 서울인데" 또는 "여기 경북 문경이거든"이라고 정확히 지명을 댄다.

물론 '내려간다'는 말은 위도상의 개념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서울사람들이 김포나 고양, 파주, 의정부, 가평, 홍천, 춘천에 갈 때는 '올라간다'는 표현을 쓰는지 궁금하다.


얼마전 서울 다녀오는 길에 KTX 객실에 비치된 월간잡지를 읽던 중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부모님 모시고 오빠네 가족, 동생네 가족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나려 한다면 벽초지문화수목원이 제격이다. 우선 경기도 파주에 있으니 이동시간이 짧아 부담이 없다. 혹 누가 급한 일이 생겨도 늦게라도 달려올 수 있지 않겠는가."

황당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으니 이동시간이 짧다고? 한국철도공사가 발행하는 < KTX매거진 >이라는 잡지는 원래 서울지역 독자만을 배포구역으로 하는 건가? 나는 마산에 산다. 그런데, 경기도 파주까지 이동시간이 짧아 늦게라도 달려올 수 있다니….

서울 인구가 많기 때문이라고? 5000만 중에 고작(?) 1000만이다. 경기도와 합쳐도 50%가 안된다. 물론 그것도 지나치게 많은 것이긴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이 넘는 대한민국 사람은 '열외 인간'인가?

지역에는 '엽기사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쩌다 'KTX매거진'을 예로 들었지만, 이런 사례를 찾자면 끝이 없다.

요컨대 서울사람들 눈에는 마산이나 광주나 대전이나 모두 '지방'으로만 보인다는 것이고, 그런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말글살이에서 그냥 무시해도 좋을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이건 진보나 보수나 하등 차이가 없다. 평등을 외치는 진보인사들도 정작 지역간 불평등이나 서울 이외의 지역을 모두 낮춰보는 인식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이 없다. 계급모순, 분단모순을 떠드는 사람은 있어도 지역모순을 거론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기간 중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 미디어오늘 >의 최훈길 기자는 '봉하마을엔 경향·한겨레만 있다'는 기사를 썼다. 그건 왜곡보도였다. < 경남도민일보 >와 < 부산일보 >, < 국제신문 > 등 지역일간지들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기사를 읽고 동료인 김훤주 기자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더니, 김 기자가 < 미디어오늘 >에 항의성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최훈길 기자의 변명이 걸작이었단다. '(지역신문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 기사는 약간 수정됐다.) 그 얘길 듣고 서울기자의 눈에는 지역신문이 신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지역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울사람들의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엽기사건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요즘 '좌파정권 10년'이니 '꼴통'이니 하는 발언으로 서울언론의 눈길을 끌어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김태호 경남도지사가 참 애처롭게 보인다. 그런 엽기적인 발언 말고는 서울언론에 이름 석자 언급이라도 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소영 정부'와 '강부자정권' '조중동의 여론독점'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정작 서울 이외 지역은 식민지로 취급한다. 황석영이 1989년 북한에 다녀와서 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북한에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지역에도 사람은 살고 있다.

※지난 9일 <미디어스>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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