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꽃잎에 눈길 빼앗기지 않기를

김훤주 2008. 3. 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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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과 점심 창원을 가로지르는 창원대로를 자동차를 몰고 오갔습니다. 길 가 양쪽으로 벌어선 벚나무들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꽃눈만 야무지게 물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둘 꽃망울로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화들짝 피어난 목련은 이미 허드러져 버려서 철모르는 아이들 웃음만치나 커져 있고요, 어금니 앙다문 듯한 개나리도 저만치서 노랗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습니다.

발 밑 어딘가에는 제비꽃이 피었을 테고, 그 옆에는 보송보송 솜털을 머금은 새 쑥이랑 피나마나 하얗게만 보이는 냉이꽃까지 어우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따라 화사한 햇살이 아주 좋은데, 어울리지 않게시리 꽃잎의 떨어짐이 '퍽' 뒤통수를 때리며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떨어지고 나서도 아름다운, 그런 꽃잎 말입니다. 그러는 다른 한편으로는, '꽃잎에 눈길 빼앗겨서는 절대 안 되지.', 꼭 다져 물었던 옛날 입술도 생각이 났습니다.

지고 나서도 추해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제 아무리 아름다운 존재가 있어도 그 때문에 정신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라는 존재가 왜 이리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는 상태로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다섯 해 전인 2003년 5월 26일 <전라도닷컴>에 실렸던 글입니다. '그냥' 그 때 생각이 나서, 한 번 올려봅니다.

꽃잎에 눈길 빼앗기지 않기를

창원은 공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밤에 공장지대를 걸어보면 아주 삭막합니다. 그렇지만 봄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87년 처음 맛본 봄은 더욱 그랬습니다. 4월쯤이었겠지요.

마산서 시내버스를 타고 공단 한가운데인 창원 내동에 내렸습니다. 갑자기 때 아니게 눈발이 흩날리고 바닥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데군데 쌓인 눈을 밟지 않으려고 폴짝 뛰어 내려섰습니다. 그렇지만 바람은 여전히 따스했고 눈은 살갗에 닿아도 전혀 차갑지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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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었습니다. 꽃잎이었지요. 낮에 보면 분홍이지만 어두운 밤이다 보니까 하얗게만 보였을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꾸벅꾸벅 졸기만 했으니 꽃잎 흩날리는 바깥에다 눈길을 두고 저게 무얼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던 겁니다. 창원공단 도로에는 어김없이 벚꽃이 심겨 있습니다. 바이어로 많이 오는 일본 사람 비위 맞추려고 일부러 심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아니리라고 여기지만, 그 때는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정권이 족히 그리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했지요.

어쨌거나 그 뒤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동료들이랑 어울릴 때는 벚꽃이 한 몫 단단히 했지요. 공원 나무 아래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노라면, 밤이 깊어갈수록 꽃잎은 더욱 하얗게 빛나며 난분분 흩어지는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도 바뀌어 길바닥이나 공원에 자리를 잡는 일은 줄었습니다. 하지만 벚나무는 그 새 더욱 자라서 왕복 8차로 공단대로 양쪽에서 아주 무성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이제 드넓은 아스팔트를, 날리는 바람 따라 구석구석 쓸고 다닐 정도로 굉장해졌지요.                

그렇지만 꽃잎 뒤에 숨어 있는 공장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제가 다닌 공장은 창원공단 신촌 쪽 들머리에 있었는데요, 아침 7시40분 출근해서 11시40분까지 쇠를 깎고 붙이고 접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100명 남짓한 동료들과 40분 동안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일을 했습니다.

제가 다닌 공장은 다른 공장보다 40분 이른 오후 4시20분이면 일단 일이 끝났습니다. 아직 환하니까, 무엇보다 8시간 노동만으로는 지탱이 안되니까, 또 동료들 절대다수가 잔업을 하니까 모두들 묵묵히 잔업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2시간 잔업을 해도 6시20분이면 마치니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니었습니다. 공장에서는 시간 맞춰 빵과 우유를 줍니다. 물론 2시간 더, 8시 20분까지 잔업하는 사람에게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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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햇살과 꽃잎으로 눈부시게 환했지만 천장이 높은 공장 안은 어둡고 축축한 느낌까지 주었습니다. 울타리에 잇닿아 개구리 울어대는 논이 있었고 집집마다 어깨를 맞댄 마을이 철거가 덜 된 채로 추레하게 있었습니다. 들머리에는 조그만 ‘점방’이 하나 있었지요. 외상으로 라면을 먹기도 하고 쥐치포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허름한 방을 월세로 내놓은 집도 몇 개씩 있고 여기 자취하는 사람도 일행 가운데 있게 마련이어서 많이 취하면 한 번씩 신세를 지기도 했었지요.

88년 4월 ‘조직의 부름을 받아’  공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그랬습니다. 또 자기가 일했던 데를 둘러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감상적 작태’는 멀리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어쩌다 갈 일이 생겼습니다. 봄꽃이 한껏 휘날리던 지난 4월 초순이었습니다. 갑자기 여러 기억들이 샘처럼 솟아났습니다. 잔업하라고 윽박지르던 반장과 실권이 없던 직장, 한 달에 250시간씩 잔업을 하던 10살 많은 형님에다 담벼락에 기대앉아 소주 한 잔 담배 한 모금 같이 나누던 ‘현태’라는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외준’이라는 형도 생각났습니다. 얼굴이 검은 편이었는데, 죽이 잘 맞아 철야를 하다가도 곧잘 ‘점방’으로 빠져나가 라면 하나 끓여놓고 소주 한 병 비우고 돌아오던 기억도 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발을 헛디뎌 논도랑에 아랫도리를 흠뻑 적신 기억도 있더군요.

지금 이름은 잊었는데 오른손 둘째손가락 첫 마디를 프레스에 빼앗긴 고3 실습생도 있었습니다. 그해 9월쯤 3개월 수습기간이 지나자마자 마디를 날렸는데, 술을 마시면 “나중에 가수가 될 건데 이 손으로 어떻게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겠냐”며 울먹이곤 했지요.

갑자기 그동안 벚꽃 때문에 찾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를 달뜨게 하는 꽃잎에 어리어, 허름한 공장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청춘이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날 따라 지는 꽃잎이 유달리 아름다워서 든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던 공장도 둘레가 많이 달라졌더군요. 적어도 겉보기에는 모양이 반듯해졌고, 그 새 들어선 다른 공장들도 살벌한 철조망을 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공장 옆 마을은 철거로 없어지고 위쪽에만 절반쯤 판자촌이 남아 있었습니다. 낡은 유리창에 떼가 덕지덕지 앉은 옛날 ‘점방’도 사라지고 깨끗한 중국집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여기 모이는 사람들의 나날살이도 옛날 같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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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찾은 까닭은 성이 신씨인 한 할아버지에게 반찬이랑 소주랑 과자·사탕을 건네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옛날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지내는 분이셨습니다. 한참을 걸려 조그만 방 한 칸을 찾았는데 올해 62살인 할아버지는 차가운 방 딱딱한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걸어 다닐 수 없는 데다 보살핌도 없다 보니까 텔레비전을 켜놓고 멍하니 눈길을 꽂아두고 있었습니다.

길게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바빠서 금방 나와야 했으니까요. 도시락 배달을 받아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얘기, 날씨만 좋아도 버티겠는데 날씨가 흐리면 다리가 너무 아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침대 위쪽에는 한 때의 반듯한 삶을 일러주듯, 좋은 옷감으로 지어 곱게 다려 놓은 바지가 ‘어울리지 않게’ 걸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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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나오려는데 왼쪽 손등에 벌겋게 벌어진 상처가 눈에 띄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두 줄로 깊고 길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 사는 게 하도 기막혀 술 마신 김에 칼로 그었는데 동맥을 따지 못해 이렇게 됐다고 했습니다. 열흘쯤 전에 바로 옆방에 사시던 영감이 세상을 떴고, 영감과 같이 살던 할머니도 다른 데로 가시는 바람에 더욱 쓸쓸해지셨나 봅니다.

꽃잎 휘날리는 넓은 도로 뒤쪽에, 아직 안 무너진 게 신기한 건물 구석에, 이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는,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일이 아직 있었습니다. 이제는 없어졌을 것이라고 무심히 여기지만, 모습은 옛날과 달라졌을지라도 죽기보다 힘든 팍팍한 삶들이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공단 거리로 접어드니 다시 꽃잎이 눈에 밟혔습니다. 지는 꽃잎에 한 번이라도 황홀해져 본 이는 아시겠지만, 거리를 온통 채운 꽃잎은 현실과 걱정거리를 잊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꽃잎에 눈길 빼앗기지 않기를 빌고 또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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