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갯벌의 절반이 사천에
갯벌이라 하면 어디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 이런 질문을 받고 사천이라고 선뜻 답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같은 경남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전남 순천만이나 서해안 쪽 신안·무안 일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천은 틀림없는 갯벌의 고장이다. 경남 갯벌의 절반이 사천에 있다 해도 틀리지 않다.
물론 사천만의 동쪽 부분인 사천읍·사남면·용현면 일대 갯벌이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갯잔디가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사천만갯벌(부분).
하지만 광포만까지 포함하여 사천만의 서쪽 부분은 대부분 그대로 살아 있다. 동쪽 또한 다치기는 했어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선진리~주문리 갯가는 이른바 ‘실안노을길’에서 가장 빛나는 길목이다.
남강댐에서 가화천을 통해 사천만으로 초당 최대 3250t이 쏟아지는 바람에 갯벌이 작지 않게 망가진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만 잘피 우거진 사천만이 물고기 산란장 기능을 전혀 못할 지경까지 된 것은 아니다. 남해안 수산자원 형성에 여전히 이바지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철 마르지 않는 고방(庫房)이고 자식들 공부시키는 돈줄이 되어주었던 사천만갯벌은 이제 다함께 어우러지는 놀이터가 되었다. 사천만에 깃들인 역사·문화는 또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남에 셋뿐인 조선시대 조세 창고
1760년 설치된 조창(漕倉) 가산창은 가화천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축동면 가산리)에 있었다. 1660년 축동면 구호리에 들어섰던 장암창이 100년 만에 이리로 옮겨오면서 이름을 바꿨다.
옛적 조세로 거둔 곡식·면포와 특산물을 모아두는 창고였다. 관할 지역은 사천·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고성·의령이었다.
조세물품은 임금이 있는 서울로 옮겨졌다. 그래서 조창은 강가나 바닷가에 들어섰다. 경남에는 조선 시대 조창이 셋 있었다. 사천(당시는 진주)의 가산창과 마산(당시는 창원)의 마산창은 바닷가에 있었고, 밀양의 삼랑창은 강가에 있었다.
육로와 수로가 두루 좋아 물품을 끌어 모으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남해안·서해안을 거쳐 한강 하구까지 오가는 바닷길과도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산창은 옛적 사천만이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교통의 핵심이었음을 일러준다.(사천만에는 고려시대에도 조창(통양창)이 있었는데 지금 용현면 선진리 일대다.)
사천만갯벌. 옛날에는 이렇게 갯벌이 너르고 조수간만 차이가 클수록 좋은 항구로 대접받았다.
사천만은 전통시대 훌륭한 항구였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린다. 얕은 사천만 바다에 커다란 배가 드나드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남강댐 방수로에서 한 자락 풀린다. 가화천을 통하여 들어오는 방류수가 그 내만(內灣) 중선포천·사천강 등의 물길을 막았다. 덩달아 떠내려 오던 모래와 흙 또한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옛날에는 여기 바다가 지금보다 깊었다는 뜻이다.
의문의 다른 한 자락은 선박 동력의 변화가 풀어준다. 바닥이 뾰족하고 물에 깊이 잠기면서 모터로 프로펠러를 돌리는 요즘 배는 밀물·썰물 차이가 적고 물이 깊어야 좋다.
하지만 바닥이 편평하여 깊이 잠기지 않고 노·돛이 동력인 옛날 배는 달랐다. 밀물·썰물 차이가 크고 깊지 않아야 좋았다. 그래야 밀물 때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사천만이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서 있는 석장승 네 쌍
조창은 가까운 고을에서 곡식과 면포와 특산물을 끌어 모았다. 재물이 모이는 장소에는 사람 또한 끓게 마련이다. 사람이 끓으면 일거리가 늘어나고 놀이도 생겨난다. 일과 놀이가 벌어지는 데서 역사와 문화가 이루어진다.
가산창은 가산오광대라는 놀이를 낳았고 마을 앞에다 돌장승도 세웠다. 돌장승은 지금 가산리 석장승이라고들 한다. 석장승은 처음에는 가산창 수호신이었다.(관립)
뱃길에서도 조창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석장승을 세워두고 뱃길도 평안하게 해주고 조창도 지켜 주십사 빌었던 까닭이다. 갯일 뱃일이 언제나 편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장승을 세우고 무사안녕을 빌 까닭이 없었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험했기에 이렇게 신상을 세우고 기댔던 것이다. 그런데 조정에서 세운 가산창이 1895년 없어진 뒤로도 석장승은 남았다. 이번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동네를 지켜주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십사 비는 대상으로 섬김을 받게 되었다.(민립)
사천가산리석장승. 아래 제사지내는 자리에 초가 한 자루 세워져 있다.
석장승은 지금도 여기 사람들 마음속에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석장승 앞에 촛불을 켜놓고 북어를 진설하고 막걸리를 뿌리며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서가 아니다.
가산리 석장승은 모두 네 쌍이다. 마을 들머리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에 제각각 남녀가 두 쌍씩 있다. 다른 데는 많아봐야 한 쌍이 고작인데 여기는 이토록 많이 있다.
게다가 언젠가 한 쌍을 도둑맞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1980년 새로 만들었다. 믿음이 끊어졌다면 굳이 새로 세울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가산리 석장승은 별나게도 생겼다. 보통 장승은 몸집이 크고 눈은 퉁방울이지만 여기 석장승은 문인석상처럼 생겼고 몸집이 작다. 여자 석장승은 머리카락을 둘로 묶은 모양이 도깨비뿔처럼 보인다.
사천만이 교통요지였음은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 유람 첫 걸음을 사천에서 내디뎠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남명은 지리산을 둘러보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써서 남겼다.
<유두류록>을 보면 남명은 1558년 4월 11일 삼가현 외토리 계부당(鷄伏堂)을 떠나 진주 자형 집에서 사흘을 묵었다. 그런 다음 15일 사천만에 와서는 축동면 구호리 쾌재정 앞(중선포中宣浦로 짐작)에서 배를 탔다. 배는 남해 바다를 거쳐 섬진강으로 들어가 하동 화개까지 거슬러 올랐다.
민중의 미래세상 염원을 담은 매향비
곤양면 흥사리 들판과 산기슭이 만나는 언저리에 사천매향비가 있다. 고려 우왕 13년(1387년) 세워졌다.
매향(埋香)·침향(沈香)은 단단하기는 금강석보다 더하고 향기롭기는 그 어떤 꽃보다도 더 진하다고 한다. 이를 흠향하게 될 부처는 현세불(석가모니)도 내세불(아미타)도 아닌 미래불(미륵)이었다.
고통스러운 백성들에게 희망이란 현실이 아닌 미래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고려 말기 민중들은 겹으로 고달팠다. 안으로는 권문세족한테 시달렸고 밖으로는 왜구한테 당했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서글픈 비원이 56억7000만년 뒤에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었다.
사천매향비. 왼쪽 위에서 아래로 '都計四千一百:모두 합하여 4100'이라 적혀 있다.
<사천시사> 437쪽에는 빗돌의 재질이 흑운모 화강암이라 적혀 있다. 하지만 가서 보면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 화강암보다 무른 화성암 계열이다. 그래서 새겨져 있는 글자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닳았다.
매향의 주체가 중앙의 존엄한 귀족이었다면 사천 바닷가 아무데서나 구해지는 이런 무른 돌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목은 “많은 사람이 계를 모아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 글(千人結契埋香願王文)”이다. 끝머리에는 “모두 합해 4100(都計四千一百)”라 적혀 있다.
4100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숫자다. 1425년 나온 <경상도지리지>를 보면 당시 곤남군 호구가 210호에 3062명으로 나온다.
매향비가 발견된 지역은 옛적으로 치면 곤남군에 포함된다. 매향을 위하여 금품을 내고 발품을 팔고 조직을 모으고 지식을 보탠 인원이 고을 전체 인구보다 많다. 민중들의 대규모 결집은 지배계급에게는 위력시위로 작용되었을 수도 있겠다.
일제강점기 비행기 격납고
사천에는 경남에 하나뿐인 공항이 있다. 사천공항이다. 사천은 ‘항공산업의 메카’를 꿈꾼다. 사천만 갯벌을 매립하고 들어선 산업단지들도 대부분 항공 관련이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중선포천과 사천강 사이 사천읍 수석리 일대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사천 항공 63년사>(2016년) 16쪽은 이렇다.
“1939년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천평야에 군용 비행장 건설에 들어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은 사천비행장에 전투용 항공기를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버려둔 채 물러났다. 사천비행장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사천시사>(2003년)의 1552쪽 기록은 이렇다.
“사천비행장은 일제가 1940년대 초에 건설을 시작하여 마무리 단계에서 패망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경폭격기와 연습기가 비행장에서 활공을 하였다는 지역 촌로들의 진술을 들을 수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격납고(格納庫)는 비행기를 감추어두는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격납고가 사천에 아직도 남아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밖에서 바라본 비행기격납고.
비행기 격납고 안에서 내다본 모습.
윤병렬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교사모임 대표와 함께 정동면 예수리를 찾았다가 보았다. 성황당산 북쪽 기슭을 사천강으로 이어주는 논배미 옆에 있는데 위로는 호박덩굴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 두께는 20cm쯤 되었다. 몇 군데 금이 나 있었지만 철근을 섞어 만든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튼튼해 보였다. 지름이 20m 남짓 되는 납작한 반원형이었다. 비행기가 드나들었을 뒤쪽은 너비가 10m 안팎, 높이가 3~4m였다. 앞쪽은 좁고 낮아서 너비가 5m 안팎 높이가 1m 남짓이었다. 지번을 확인하니 예수리 180-2였다.
깊은 산중에 있지 않고 집과 논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적지 않게 알려져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하지만 ‘사천 격납고’로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다.
윤병렬 대표는 “한 때 예수리에 살아서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20채 넘게 있었는데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비행기가 사천읍에 있던 비행장에서 격납고까지 모래사장을 타고 굴러왔다는 얘기를 동네 어른들한테 들었다”고 덧붙였다.
행여 격납고가 더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여러 차례 찾아가 살펴보았으나 더 찾지는 못했다.
이처럼 사천만 갯벌은 일제에 짓밟힌 자취도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 관심을 받지 못하고 지금껏 그냥 내팽개쳐져 있다.
같은 일제강점기 격납고이지만 제주도 알뜨르비행장의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와 밀양시 상남면의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 두 군데는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사천의 이 격납고도 고유한 특징과 의의를 재확인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를 받게 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작도정사. 퇴계 이황이 곤양군수로 와 있던 스승 어득강과 회 치고 잔질하며 인생과 자연을 논했던 자리에 들어서 있다.
지구의 역사 새겨진 대섬
이밖에 곤양군수로 있던 스승 어득강(1470~1555)을 1533년 퇴계 이황(1501~1571)이 찾아와 함께 노닌 자리 작도정사(서포면 외구리 105-1)도 있다.
지금 사천시 행정구역에서 곤양면·곤명면·서포면이 당시는 곤양군 소속이었다. 퇴계는 어득강 곤양군수와 함께 밀물이 빠질 때 배에서 내려 까치섬(작도=鵲島)에 올랐다. 고기를 회치고 술을 잔질하며 습지와 자연의 이치를 논했다.
이를 기리는 건물이 작도정사다. 지금은 육지 한가운데에 있다. 일제 말기인 1938년 일본 사람 야마타(山田)가 일대 갯벌을 간척해 논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우거진 대섬. 드러난 지층에는 지구의 오랜 역사가 나타나 있다.
대섬 바닥에 가로세로 놓여 있는 나무화석.
대섬(용현면 통양리 산 15-1111)도 찾을 만하다. 대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대섬인데 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썰물 때 100m 정도 걸으면 들어갈 수 있다.
다양한 지층이 어지럽게 나타나 있다. 그런 지층을 따라 화석도 여러 가지 나온다. 특히 볼만한 것은 나무 화석이다. 한 방향으로 나란히 쓰러져 있지 않고 이리저리로 여럿이 어긋나게 쓰러져 있다. 땅이 흔들렸거나 하늘이 흔들렸거나, 아니면 둘 다 흔들렸거나 했을 것이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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