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빙 필자의 글/박영주의 사진과 역사 이야기

마산 몽고정의 애초 모습을 찾았다

기록하는 사람 2017. 3. 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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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마산의 명소 몽고정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며칠 전 그 앞을 지나다보니 지붕 공사를 하고 있기에 이 사진을 떠올리고는 올려본다. 예전에 일본의 경매 사이트에서 찾아둔 사진엽서이다. 오늘 다시 찾아보니 사라지고 없다. 그 사이 팔린 건지... 이 사진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찍은 게 한 장 더 있는데, 거기에는 사람은 없고 우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좁은 길이 보인다. 그 사진보다 당시 상황을 더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이 사진을 소개한다.

사진을 가만히 보면 우물은 벽돌로 쌓은 네모난 우물틀(우물턱) 위로 나무기둥에 함석지붕이 있는 모습이다. 우물가에는 납작한 판석을 깔았고 돌담이 둥글게 우물을 에워싸고 있다. 돌담 뒤로는 울타리로 심은듯한 몇 그루 나무가 서 있고 왼쪽으로는 초가가 보인다.

물동이 인 흰옷 입은 아낙네가 사진사의 요구에 응해 자세를 취해 준 모양새다. 이 사진의 앞쪽에 하얀 색의 둥근 원이 조금 보이는데 바로 오랜동안 몽고정 옆에 세워져 있었던 '몽고정 연자매'이다. 한때는 몽고군의 전차바퀴니 어쩌니 하는 억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지금은 마산박물관 앞 마당에 옮겨져 있다. 그 당시에는 몽고정 앞 바닥에 깔린 채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진에는 좀 고약한 게 있다. 우물틀에 지게를 기대놓았는데 거기에 실린 건 바로 똥장군이 분명하다. 다른 사진에는 오른쪽 높은 길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 사진에는 우물 옆으로 옮겨 놓고 찍었다. 아마도 좀 색다르게 보이려고 의도한 것 같다. 식민지 시기 제작된 다른 사진엽서도 그렇지만 이 사진에서도 당시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이미지에는 한국은 근대화되지 못한 봉건사회라는 시선이 투영되어 있고 그들은 이를 즐겨 소비했다.

마산 사람이면 몽고정 모르는 이 없지만 자세한 모습은 잘 모른다. 지금은 폐선이 된 경전선 철도의 높은 석축 밑의 구석진 곳에 있는데다 그나마 기와지붕이 덮고 있어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는 우물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고 바로 뒤에는 집까지 있었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1933년 11월 사적 연구차 마산을 방문했던 일본인 사학자 오타니(大谷) 박사가 몽고정을 보고 "중년에 민간에서 판 것이고 고적이 아닌 것을 단안하였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당시에 이미 몽고정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몽고정은 원래 위치에서 옮긴 것이라는 또다른 기사도 있다. 1926년 8월 동아일보에 몽고정을 소개하는 기사에 "근년에 와서 철도공사관계로 舊基에 조금 옮겨판 後로는 飮料水質이 少變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철도는 사설철도 회사인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건설한 경남선이다. 1922년 6월에 마산 군북 구간 공사가 시작되어 1923년 12월에 이 구간이 먼저 개통되고 1925년 6월에는 군북 진주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경남선 전 구간이 개통되게 된다. 마산에서 군북으로 연결되는 철도 노선이 몽고정 위로 지나가면서 애초의 몽고정은 철로 아래 묻히게 되었고 우물은 새로이 팠음을 알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유명한 우물이라 아예 없앨 수는 없어서 다시 팠을 것이고 아마도 원래의 위치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을 택했을 것이다.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희미하긴 하지만 우물틀이 위 사진처럼 네모꼴이 아니라 둥근 모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철로 기반 공사를 하면서 우물도 같이 팠는지 철도 개통 이후에 따로이 팠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26년 동아일보 기사에 사진이 실려 있는 걸로 봐서 그 전에 새 우물을 판 것이고 위의 사진은 1923년 이전에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타니 박사가 답사했을 때는 우물을 새로 판지 채 십 년이 되지 않았을 때니 한눈에 '고적이 아닌 것으로 단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이미 蒙古井이라 새긴 표석이 있었을 것이다. 표석은 1932년에 마산고적보존회라는 단체가 세운 것이라 한다. 표석 뒷면에 글이 여러 줄 새겨져 있는데 해방 후에 누군가가 글자를 정으로 쪼아버려 판독이 어렵다. 그래도 탁본을 떠서 자세히 보면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군북 진주로 연결되는 철로가 놓이기 전의 몽고정의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 1904년 당시 삼랑진 마산간 군용철도 부설과 관련해 마산의 일본영사관과 일본 육군성 사이에 오간 기밀문서에 첨부된 약도에 보면 척산리 앞을 지나는 길가의 몽고정 위치에 우물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도 주요한 지형지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로가 놓이던 시기를 전후해서는 스와시로(諏方史郞)의 馬山港誌에 단편적이지만 중요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貢稅山(지금의 추산) 아래 튀어나온 길가에 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된 우물이 있고 거기에는 구멍 뚫린 매갈이돌(籾摺石)이 있는데 이는 그 옛날 蒙古征東軍이 주둔 중에 판 근거라는 것이다. 또 그보다 낮은 쪽 길가 양측에는 鬼面을 새기고 天下大將軍 地下大將軍이라고 적은 표목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몽고정이 지금은 자산동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서성리였고 수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름난 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고정은 위쪽으로 광대들이 놀던 큰 바위가 있어 광대바위샘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目拔선생의 馬山野話에 보면 당시 마산시내에 흩어져 있는 공동우물 중에 자산동의 우물 두 곳과 몽고정 은상이골샘 등 네 군데 우물은 고려연합군이 굴착한 것이라고 한다. 또 일제강점 초기 각 지방의 공동우물 수질검사 결과 마산에서는 통샘 보통학교정 몽고정의 수질이 가장 우수한 걸로 나왔고 이 소문이 나자 마산시내 양조장은 물론 진해에서까지 화차로 급수해 가기도 했다고 한다. 몽고정은 이후 오랫동안 몽고간장 무학소주와 더불어 '물좋은 마산'의 상징이기도 했다.

몽고정 아래쪽은 매립되기 전에는 바다가 쑥 들어온 곳으로 '서성굼티'라고 불렀다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매립 전의 이 일대는 좁은 목처럼 된 지형으로 옛 마산포와 척산리 완월리로 이어지는 옛길이 있었다. 이런 지형과 장승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곳이 예전에는 장승배기(다른 말로 벅수거리)였지 않을까 싶다. 대개 장승은 마을의 경계지점에 세워졌던 이정표이자 수호신이었다.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유서깊은 우물까지 있어 길가던 나그네도 목을 축이며 쉬어가던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몽고정과 그 주변에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테마로 하는 조형물이나 기념관을 만들어 우리 지역의 역사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몇년 전 일본에서 여몽연합군의 전함이 바닷속에서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서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2015년에도 발견되었고 그간 세 척의 선박과 수천 점의 유물이 함께 발굴되었다고 한다. 730년이 넘게 바닷속 모래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니 정말 놀랍다. 유물이 정리되고 공개된다면 꼭 가서 보고 싶기도 하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원정은 당시 동아시아를 뒤흔든 전쟁으로 원나라와 고려, 일본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마산의 역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오래된 엽서에 담긴 몽고정 사진은 철도 건설로 훼손되기 전의 몽고정의 애초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자료이다.

글쓴이 :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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