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기록을 보면 1945년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떨어진 핵폭탄 관련 통계는 대충 이렇습니다. 전체 피폭자 69만1500명에 폭사자가 23만3500명(33.77%)입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처음 듣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7만명이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4만명이 죽고 나머지 3만명 가운데 2만3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7000명은 일본에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2만3000명은 대부분 이북이 아닌 이남에 연고가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수탈과 전쟁물자 강탈로 먹고 살 터전을 잃어버린 조선 사람들이, 남쪽은 주로 일본으로 가고 북쪽은 주로 만주로 갔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2만3000명 가운데 한 사람이 김형률(1970~2005)의 어머니(이곡지)입니다. 부산지하철공사노조 요청으로 5월 22일 김형률 추모 문화제에 가서 알았습니다. 이곡지는 히로시마 피폭 당시 다섯 살(40년생)이었습니다. 

 

김형률 어머니.

 

경남 합천에서 국민학교만 나왔는데 남편 김봉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해 부산에서 살면서 자녀 여섯을 낳았습니다. 70년생 김형률을 기준으로 보면 형이 둘 누나와 여동생이 하나씩 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로 같이 태어난 남동생은 1년 반 만에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다섯 가운데 선천성으로 질병과 고통에 시달린 사람은 김형률 하나였고 ‘핵피폭 유전’이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핵피폭 1세대도 적지 않게 많지만 김형률과 같은 핵피폭 2세대, 그리고 3세대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2세대와 3세대에는, 김형률의 형제자매처럼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많고 김형률 자신처럼 질병과 고통을 유전으로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2004년 인권위원회가 조사해 2005년 2월 발표한 자료를 따르면 핵피폭2세대가 5000명가량 됩니다. 물론 이는 전수(全數)조사가 아니었으며 질문에 대답해온 숫자일 뿐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모릅니다.(저도 바로 그랬습니다.) 심지어, “(핵피폭자와 그 2세·3세들이) 그렇게 많다면 이토록 알려져 있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아, 핵피폭자가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핵피폭자와 그 2세·3세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미국·일본·한국 정부의 잘못과 책임이 클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무시하고 방치하고 숨기고 가리고 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정부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질병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은 왜 가만히 있었지?’ 하고 궁금해합니다. 어쩌면 김형률이 2002년 3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기가 갖은 질병과 고통을 겪고 있는 핵피폭2세’임을 밝혔던 때로 돌아가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정황은 이렇습니다.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28~33쪽에서 가져왔습니다. 당시 김형률은 질병과 고통을 온통 감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자립을 위해 취업에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밤샘을 마다 않고 작업하던 2001년 5월 어느 새벽녘, 갑작스레 심각한 가슴 통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급성폐렴의 재발이었다. 


6월 퇴원한 김형률은 부친과 함께 부산지방법원에서 미쓰비시 관련 재판(조선인 강제 징용)을 방청하고 ‘미쓰비시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에 자신이 ‘한국원폭2세’임을 스스로 밝히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김형률이 입원해 있는 동안 부친은 원폭1세 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를 찾아 아들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002년 2월 김형률의 모친은 자기 여동생을 비롯한 한국인 피폭자 열네 사람과 더불어 일본 히로시마를 찾아가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았다.-수첩이 있으면 일본 안팎에서 건강 검진과 치료를 받을 수 있고(비(非)일본인에게는 의료비 상한이 있음) 의료보험료 본인부담분과 건강관리수당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친이 히로시마에서 돌아온 뒤 김형률은 자신이 원폭2세임을 밝힐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한국에 온 2002년 3월 22일 김형률은 ‘자기가 원폭피해 2세’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이 기자회견은 고민 끝에 내린 김형률의 ‘인권선언’이었다.

 

대구의 ‘미쓰비시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이 이런 기자회견을 제안했을 때는 정작 당사자인 김형률이 주저했었다. 모친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여동생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또 원폭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차별·편견을 두려워하는 다른 원폭2세나 단체의 반발도 예상됐다.

 

기자회견은 여러 가지 보도매체에서 잇달아 다루는 등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기대했었던 다른 원폭2세의 연락도 없었으며 오히려 ‘협회’ 간부의 반발만 사게 됐다.

 

그렇습니다. 원자폭탄(핵폭탄)을 맞았다고 하면 웬지 꺼려지고 어쨌든 피하거나 외면하고 보는 사회 분위기, 그이들을 무시·멸시하고 차별하는 사회 전체 차원의 무의식, 이런 것들이 핵피폭1세대는 물론 그 2세와 3세까지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실정은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251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2005년 2월 (한국)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공표한 ‘건강실태조사’는 한국 원폭2세에 대한 건강 실태조사로는 처음인데, 이런 정도 규모 조사조차 일본에서는 원폭2세에 대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원폭2세에 대한 조사 자체가 사회 전체에 피폭자 차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피폭자단체에서 오히려 조사를 기피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싶은 일본도 원폭2세에 대해서는 거의 방치 수준이라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피폭자1세와는 달리 피폭자2세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는 구체적인 원호대책이나 법률은 별도로 없는 실정이다. 대신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피폭자2세를 대상으로 의료지원이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례를 시행하고 있다.”(270쪽)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이 우리나라 핵피폭1세대는 물론 2세대나 3세대의 실정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현실을 깨고 나온 김형률의 기자회견이 대단할 따름입니다.

 

이 책을 펴낸 아오야기 준이치씨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렇게 적었습니다.(250쪽)

 

“사회가 강제하는 ‘침묵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어버린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의 증거이기도 한 ‘생존권’을 선언하여 살아남을 것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기 시작한 시점에, 김형률은 명확하게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부가 후쿠시마의 피해를 가능한 최소화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거나 방사능 오염의 무서움을 말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일본의 현황을 생각하면, (그래서) 그의 용기와 결의에 기반한 ‘인권선언’, 즉 커밍아웃의 고결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김형률은 한국인 원폭2세라는 압도적 소수파였으며 게다가 당시 한국 사회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인식 수준을 생각하면 후쿠시마의 피해자들에 비해 훨씬 어려운 처지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자손들이 ‘유전적 영향의 심각함’을 스스로 고백하지 못하는 것처럼, 후쿠시마의 피해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 없이 ‘침묵의 어둠에서 어둠으로’ 묻혀져갈 가능성이 높다.(그런 이유로 이 책은 일본어판을 먼저 출간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까지도, 스스로 핵피폭2세임을 밝히면서 ‘핵피폭의 유전적 악영향’을 앞장서 주장하는 주체는 오로지 김형률(그리고 김형률이 초대 회장을 지낸 ‘한국원폭2세환우회’)밖에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이와 같은 핵피폭2세에 대한 김형률의 문제제기는 단지 김형률 본인을 비롯한 핵피폭2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니지 싶습니다.

 김형률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탔다고 합니다.

5월 22일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 한 장면.

김형률의 삶이 보여주는 그대로 핵피폭으로 고통과 질병이 유전되고 대물림을 한다면 그것은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과정을 대를 이어 되풀이하는 가운데 ‘핵피폭의 유전적 악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보면 이렇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에 조사하고 2005년 발표한 ‘원폭피해자 2세 건강실태’입니다.

 

“1000세대 이상 4000명 이상 원폭2세를 조사했는데 3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고 그 중 절반 이상(52%)이 10살이 채 되기 전에 죽었다. 또 같은 세대 일반인과에 비해 심장관계 질환은 80배 이상, 우울증은 70배 정도, 조현병은 20배 정도로 심각했다.”(251쪽)

 

이런 현실을 두고 김형률은 생전에 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봐도 아주 온당한 내용입니다.

 

“원폭2세에 대해 현재 수준에서 검사 가능한 분자유전학적 조사를 하고 동시에 미래 유전학 지식이 보다 발전할 경우를 대비해 원폭2세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보관할 필요가 있다.”

 

김형률 한 사람보다 못한 대한민국 정부이고 일본 정부입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가 일어난 직후부터 후쿠시마현 의사들은 철저하게 관리돼서 사고 피해조사조차 이루어질 수 없게 됐다.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오염이 심각한 지역으로 지정되면 주민들을 퇴거·피난시켰는데 일본은 오히려 원래 살던 데로 돌아가게 하는 정책이 시작되고 있다. 


게다가 사고 직후 초기 단계에서 피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피해조사를 한다 해도 이전 조사와 비교·검토가 불가능하여 방사능 오염의 유전적 영향은 확인할 수 없게 됐다.”(252쪽)

 

그러나 방사능 오염의 유전적 악영향은 아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게다가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피폭은 일상이 됐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현실이 됐습니다.

 

“2015년 2월 현재에도 12만 명이 넘는 후쿠시마의 이재민들이 방사능 오염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또 방사능 오염물질이 바다와 하늘로 계속 방출되고 있음에도 원자로 등의 피해실태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291쪽)

 

폭탄이 됐든 발전이 됐든, 원자폭탄이라 하든 원자력발전이라 하든, 핵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우리 인간에게 미래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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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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