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 부산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 불러주는 바람에 부산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블로거들을 더 불렀던 모양입니다. 가기에 앞서 이메일로 일정을 받아봤습니다.

 

노동조합 기자회견 하나, 농성 현장 방문 하나, 그리고 김형률 생가 방문과 추모문화제 참가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형률이라……, 부산에서 여러 모로 대단하게 활동을 펼치다가 세상을 떠난 유명 인물이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산 가기로 돼 있는 날 아침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자 2세’ 김형률 아시나요?” 몰랐습니다. 이름은 부산지하철노조가 보낸 메일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이가 핵폭탄 피해자 2세인 줄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기사를 따라 읽어내려가면서 참 무심하게 살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쉬고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실감은 제 삶에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핵폭탄 피해 2세대와 3세대에 대해서는 더욱 심해 그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못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2세와 3세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쉬고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생각 또한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형률 추모 문화제 기사를 읽으면서 스스로가 참담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았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이런 사람 이런 일생을 전혀 몰랐을까? 왜 나는 손톱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못했을까? 그러면서도 반핵이 어쩌고 탈핵이 저쩌고 뻔뻔스럽게 씨부랑거릴 수 있었을까?

 

이런 느낌은 그날 저녁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치러진 추모문화제 내내 이어졌습니다. 이런 참담함이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를 사서 읽게 만들었나 봅니다.(추모문화제는 유고집 출판기념회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읽어도 반핵과 인권이 함께 붙어 있는 까닭이 잘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핵이 핵폭탄이나 핵발전처럼 추상적인 모양으로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조금씩 넘기면서, 그런 제 머릿속 생각이 차갑게 식어 딱딱하게 굳은 관념 덩어리임을 깨달았습니다.

 

핵은 인권 파괴이며 반핵 없이는 온전한 인권이 있을 수 없음을 조금씩이나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인권은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개개인이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추모문화제 행사장 모습.

김형률(1970~2005)이라는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원폭(핵폭탄 피폭) 후유증, 그 유전으로 말미암아 끝없이 대물림되는 질병과 고통이 그랬습니다.

 

인권을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권리’라 한다면, 김형률을 평생 괴롭힌 원폭2세 유전병(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과 폐렴)은 인간을 인간 이하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면역글로불린은 갖은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세포를 없애거나 그에 맞서는 물질이라 합니다. 없으면 온갖 질병에 손쉽게 걸립니다.)

 

더군다나 이런 질병과 고통은 그 어머니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1945년 8월 6일 핵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에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으니 이는 김형률에게도 그 어머니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라고나 하겠습니다.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원폭2세 환자라고 밝히면서 ‘핵폭탄 피폭에 따른 유전 문제’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그 뒤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이끌면서 인권위원회가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건강실태조사와 그 결과 공개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 핵폭탄 피폭자 1·2·3세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알려졌습니다.

 

김형률은 ‘한국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특별하게 노력했으며 반핵을 위한 국제 연대에도 힘쓰다가 2005년 5월 29일 그야말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견주면 절대 길지 않은 삶의 세월 동안, 김형률은 얼마나 많이 질병을 앓고 고통을 겪었는지를, 그이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에서 그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치가 정리한 내용을 통해 한 번 알아봤습니다.

 

아버지 김봉대.

 

김형률은 1970년 7월 28일 부산 수정동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형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봉대(鳳大)는 32살, 모친 이곡지(曲之)는 30살. 김형률은 네 번째 자식이자 세 번째 아들이었다.

 

쌍둥이 동생은 몸이 약해 한 살 반이 되던 해 폐렴으로 죽었다. 형 둘과 누나·여동생은 건강했다. 하지만 김형률은 항상 병에 잘 걸리고 어릴 때부터 1년에 몇 번씩 병원을 다녀야 했다.

 

모친 이곡지는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핵폭탄이 떨어진 중심에서 3km 정도 떨어진 후나이리가와구치(舟入川口)정(町)에서 피폭돼 부친과 언니를 잃었다. 귀국해서는 마찬가지 피폭된 모친·여동생과 함께 모친 고향인 합천 근교 농가에서 살았다.

 

남존여비사상이 뿌리깊은 농촌사회에서 아들이 없었던 이곡지의 모친은 항상 친척들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그렇지만 일본에 있는 외숙부 도움으로 이곡지는 국민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김형률은 학기마다 감기에 걸려 한 달 이상 결석을 해야 했다. 예방주사를 맞은 다음날부터 감기에 걸려 1개월 이상이나 자리에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3살 위 누나도 같은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왜 자기만 심한 감기에 걸리는지, 꽤나 슬퍼했다고 한다.

 

중1 때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후 몇 번이나 폐렴에 걸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입원할 때마다 드는 비싼 병원비는 가계를 압박했다.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아픈 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형률은 1989년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다녔던 ‘새마음야학’은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인 부산시 남구 대연동 경성(慶星)대학교에 있었다. 20세 전후 야학 시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였음과 동시에 병약한 육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뇌의 시기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여성이 생겼으나 고백을 할 수도, 사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무장해도 병약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병약한 자신이 어떻게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당시 일기장에는 자제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으며, 고은의 ‘비 맞으면서’의 한 구절도 적혀 있다.

 

내가 한 일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저 가난한 지붕 아래

불 하나 도란도란 밝혀주지 못한 채

이 역사의 20년을 따라 왔구나

그래도 쓰러지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부친 김봉대에게 김형률은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라고 묻곤 했었다.

 

1995년 25살 김형률은 폐렴으로 세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부산침례병원에서 한 특별 혈액검사 결과 병명은 ‘면역글로불린M의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인데 면역력이 신생아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약한 상태였다.

 

이즈음 김형률은 계절마다 몸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 정도로 피곤하면서도 “이렇게 나태해서는 안된다”고 일기장에 적으면서 자신을 고무시키고 필사적으로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일기는 띄엄띄엄 씌어져 있다. 이를 보면 글자를 쓰는 것도 어려워졌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컴퓨터학과 진학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체력에 자신이 없는 김형률은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언젠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26살 되던 1997년 3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동의공업전문대학 전산학과에 입학하였고, 신체의 아픔도 잊은 듯 공부에 매진하였다. 마지막 학년 2학년 때에는 학과 연구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졸업 후 취직을 대비하여 컴퓨터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김형률은 건강에도 문제가 있고 또 늦깎이 졸업생이었기에 제대로 된 취직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반년만에 창원시의 벤처기업에 취직을 하고 업무용 프로그램 개발 일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정도 거리였는데, 경력을 쌓는 것만으로도 좋다면서 열심히 일했다. 이윽고 회사 일이 바빠져, 회사 근처에 방을 빌려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일정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조건이어서 자기 돈을 들여야 했지만, 그는 몸상태도 신경쓰지 못하고 일했다.

 

프로그램 개발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도 마지 않았던 그는 회사 업무에 적응이 된 5개월째,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요즘 문제가 되는 '열정페이' 따위도 여기서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선 특히 고용한 이의 악덕이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 김형률의 분투만 보여주고자 할 뿐입니다.)

 

 

2000년에는 농협 지점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2개월이 지날 즈음, 열이 나고 기침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부모는 아들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본인도 직장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재택근무가 가능한 웹디자인 전문학교에 등록하였다. 작품 만들기에 몰두해 밤샘작업을 하던 중, 피로로 감기에 걸려 열이 나게 되었다. 작품 완성을 눈 앞에 둔 5월의 어느 새벽녘, 갑작스럽게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다. 급성폐렴의 재발이었다. 김형률은 2001년 6월까지 한 달 남짓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2002년 3월 22일 스스로를 유전으로 말미암은 핵폭탄 피해 2세임을 밝힌 커밍아웃 이래 그가 사망한 2005년 5월 29일까지 활동기간은 38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가 전력을 다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16개월 정도였다.

 

그는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결성에 전력을 기울이며 육체와 정신이 힘든 조건에서 분투의 나날을 보냈다. 특히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말까지 그의 입원 생활은 다 합해서 6회, 합계 220일이었다. 반 년 넘게 입원을 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2002년 9월 부산대학병원에서 검사받았더니 폐기능이 일반인의 20%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9월 25일부터 10월 12일까지 입원했었다. 퇴원 뒤에도 통원 치료가 필요했다. 폐렴 치료는 호흡기내과,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은 혈액종양내과에 다녀야 했다. 게다가 선천성 결핍증은 한국 의학계에 임상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암중모색 상태가 이어졌다.

 

10월 17일 저녁 피를 토하기 시작해 좀처럼 그치지 않고 출혈량이 너무 많아졌다. 부친이 달려와 구급차를 불렀으며 일하던 모친도 부산대학병원 응급치료실로 달려갔다. 응급처치로 출혈은 멈췄으나 피섞인 가래는 2주 정도 더 나왔다.

 

객혈의 원인은 기관지 주변 모세혈관이 증가했다가 터진 데 있었다.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받았는데 수술 이후에도 가래에 고름이 섞여나와 항생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해서 입원은 길어졌다. 11월 29일 2개월에 걸쳐 입원했다가 집으로 돌아간 그에게는 건강 유지 자체가 ‘투쟁’이었다.

 

그러는 동안 ‘김형률을 지원하는 모임’이 준비되었다. 김형률 본인의 희망도 있고 해서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으로 이름을 바꿔 12월 하순 결성됐다.

 

2003년 초에 39도까지 열이 올라 해열제를 먹고서야 겨우 열이 내렸다. 며칠 뒤 골수 검사에서는 혈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 기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는 결과를 들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왼쪽 귀에서 고름과 점액이 흘러내려 고막에 구멍이 생겼고, 방치하면 청력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비용이 크게 부담되어 수술을 미뤘었는데 이제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환우회’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3월 16일, 김형률은 다시 폐렴으로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 응급치료실에서 항생제 쇼크로 한 때 의식을 잃었다.

 

2003년 8월 4일(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전날) 담당의사 만류를 뿌리치고 ‘외출 허가’를 받아 부친과 함께 서울로 향했고 다음날 아침 서울시청 근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홀에서 한국 원폭2세 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저렴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독자 설립한 녹색병원에 입원하도록 했다. 10월 19일 바쁜 일정으로 피로가 쌓여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형률은 녹색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동안 간절히 바라던 대로 ‘치료비 걱정 없이’ 한 달 반 동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건강이 좋아졌다고 여겨 부산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퇴원하고 보름 정도 지나 엄청나게 객혈을 해 부산대학병원 응급치료실에서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다시 받아야 했다. 수술 후 지혈제와 항생제로 가까스로 출혈을 멈췄고 2004년 1월 하순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2004년 7월 21일 일본 나가사키현이 의사단을 합천에 보내 한국 피폭자에 대한 건강진단을 했으나 김형률과 원폭2세 환우 6명 그리고 가족 15명은 건강상담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 9월 1일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첫 번째 공식 모임이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열렸다. 김형률 이후 2대 회장인 정숙희씨 현재의 3대 회장인 한정순씨 등 14명이 참가했다. 한정순 회장은 당시 김형률에 대해 “작고 마른 체구로 무더위 속에 점퍼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 수건을 감고 기침을 계속하면서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고 힘들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김형률은 2003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면역글로불린 제제(製劑) 주사를 맞았다. 2004년 9월 9일 그 주사 직전에 과잉반응을 억제하는 주사를 맞는 순간 쇼크를 일으키고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져 쓰러졌다. 그 바람에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보름 정도 지나 퇴원했다.

 

2004년 12월 크리스마스 저녁 갑자기 객혈이 심해졌고 연말에는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또 받아야만 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이뤄진 이 수술은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2005년 1월 11일까지 김형률은 병원에서 보내야 했었다.

 

2005년 1월 김형률은 호흡기장애 1급으로 인정되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가입하고 의료보호 1종 자격을 얻었다. 7월부터 장애자복지법 시행규칙이 개정돼 호흡기계열 등의 중병 환자도 장애인으로 등록돼 의료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장애인수당도 나라에서 5만원을, 부산시로부터 6만원을 받았다. 의료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적은 금액이라 ‘사회보장’이라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제3의 인생이 열렸다고 기뻐했다.

 

2005년 3월 31일 김형률은 서울 활동을 위해 경기도 군포시 한 숙소에 들었다. 부산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정귀순 대표가 마련한 공간이었다. 김형률은 4월 11일부터 대략 50일 동안 여기 아버지와 머물면서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5월 초순 이래 20일 남짓은 지독한 강행군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로 이동하는 동분서주의 나날들이었다. 김형률은 설명회에 공청회에 발표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피곤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24일 귀국한 뒤 5일째 되는 아침 김형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출판기념회 준비 모습.

김형률은 이 때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피를 토하는 등 고통을 겪었으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이상으로 계속 심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본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삶을 두고 어느 누구도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고통과 질병입니다. 지긋지긋한 고통과 질병의 연속입니다.

 

이런 질병과 고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진 핵폭탄이 유전을 통해 안겼습니다. 핵폭탄을 터뜨린 미국이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물론 그대로 팽개쳐둔 한국도 책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김형률이 온 몸으로 일생을 통해 보여준 끔찍한 참상이, 김형률 개인 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피폭자 1세로도 한정되지 않고 앞으로는 그 자손만으로도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후쿠시마핵발전소 폭발과 소련 체르노빌핵발전소 사고는 참상을 이미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스물이 넘는 바닷가 핵발전소들 또한 앞으로 그런 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반핵이 바로 인권이라고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핵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인권도 온전하게 보장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 건강을 갉아먹고도 모자라 그 고통과 질병을 대물림까지 시키는 것이 바로 핵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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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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