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은상과 김춘수, 그리고 반야월

김훤주 2013. 3.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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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인의 사람됨, 대중가수의 사람됨

2012년 9월 20일로 기억되는데요, MBC경남의 라디오광장에서 같은 방송국의 김상헌 기자랑 둘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친일 이력이라는 말로는 크게 모자랄 정도로 전쟁 참가 선동으로 부역을 한 반야월이 소재였습니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이은상과 그 시비가 떠오르고, 둘을 한 번 비교·대조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이렇게 끄집어내 봤습니다. 대중가수와 문인, 반성·사과한 사람과 반성·사과는커녕 인정조차 안한 사람,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어떻게 보면 문인이라는 인간이, 학자라는 인간이 대중가요 가수보다 훨씬 못합니다. 반야월 이야기를 하던 당시 ‘꽃’의 시인 김춘수를 설핏 비교해 봤는데요. 그이는 본인의 친독재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했지만 그 뒤에 그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반면 이은상은 죽을 때까지 전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김춘수는 반성을 하기는 했으나 나중에 그것을 자기가 쓴 시로 뒤집어버렸습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더 나은가요? 아니면 오십보백보로 똑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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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 이제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는데요, 오늘은 무얼 두고 얘기를 나눠볼까요?


주 : 그래도 낮에는 많이 더운 것 같던데요? 어쨌거나 이번에는 마산 출신으로 몸소 노래도 하고 작사·작곡도 하면서 70년 넘게 우리나라 가요계에 몸담았던 반야월 선생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헌 : 그래요? 반야월 선생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2. 마산결핵병원 자리에 들어서는 ‘산장의 여인’ 노래비


주 : 예, 창원시가 지난 4일 국립마산병원 그러니까 예전에 마산결핵병원이던 데랑 '산장의 여인' 노래비를 세우기로 약정을 했어요. 올해 4억원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지요.

1950년대 마산결핵병원 산장병동. 창우니 사진.


그런데 이에 대해 통합진보당 소속 문순규 의원은 반야월 선생이 일제 강점기 징용 찬성을 선동하는 노랫말을 쓴 친일 인사라는 이유를 들며 노래비 건립에 대한 창원시의 지원이 부당하다는 문제 제기를 어제 19일 하고 나왔습니다.

헌 : 그렇지요. 반야월 선생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0년대 초반 '결전 태평양',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지원병의 노래' 등을 썼다지요? 그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불명예를 겪어야 했지요.


주 : 바로 그런 이유로 문순규 의원은 은 "'산장의 여인' 노래비 건립과 공원 조성은 명백한 친일파 기념사업"이라며 "국가 차원에서 친일에 대한 역사적 청산과 올바른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속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인 창원시가 이런 기념사업을 시민 혈세로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 못하다"고 짚었습니다.


3. 공공기관 예산으로 친일 인물 노래비를

2012년 10월 15일 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 경남도민일보 사진.


헌 : 그렇군요. 하지만 창원시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5000곡 넘게 작사·작곡하고, 노래도 부른 반야월 선생은 그만큼 문화적 가치가 있어 관광 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음에도, 친일 행적만 보면 그런 가치가 소멸해 버린다", "반야월 선생 부각이 아니고 '산장의 여인' 노래와 주변 배경 등을 중심으로 공원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마산에 많이 남아 있는 문화적 요소를 활성화하자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주 : 김상헌 기자는 누구 말이 맞는 것 같습니까?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헌 : 글쎄요. 문순규 의원 얘기를 들어보면 그게 맞는 것 같고, 창원시 쪽 말을 들으면 그게 맞는 것 같고 그렇네요. 어쨌거나 친일 흠결이 있는 인물의 노래비에 공공기관이 예산을 들이는 구석은 좀 찜찜합니다만.


4. 반야월은 사과.반성이라도 했는데


주 :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1927년 태어나 올해 세상을 95세로 떠날 때까지 사셨는데 반야월 선생은 그래도 자기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2010년 6월 9일 당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반야월 선생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1절부터 노래를 일본 말로 부르라고 하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싸워서 3절부터 일본말로 불렀다. 노래 녹음을 일본에서 하던 때였다. 일본에 녹음을 하러 갔는데 태평양 전쟁이 터졌다. 그 때 사장이 군국가요 작사를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못 돌아가니까 가사를 적게 했다고 한다", "시대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한 건데, 거기에 대해 사과를 했다. 어쨌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핑계다.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인정을 해야 한다".

헌 : 그렇지요.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지요.

반야월과 딸 박희라씨. 경남도민일보 사진.


5. 유명 인사의 옳지 못한 행적은 사람들 정신 건강에 해악


주 : 그 얘기는 좀 있다 다시 하면 좋겠고요. 저는 이런 논란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봤어요. 이를테면 반야월 선생을 무척 좋아하는데, 어느날 문득 그이 친일 행적을 알게 된 어떤 사람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산장의 여인 말고도, 불효자는 웁니다, 넋두리 이십년, 꽃마차, 울고 넘는 박달재, 삼천포 아가씨, 만리포 사랑,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등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아주 많습니다.

이런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친일 행적을 알고 나서는 그 노래들을 싫어해야 하느냐, 아니면 계속 좋아해야 하느냐 하는 이런 혼란을 겪지 않을까 싶어요. 사회적으로 보면 작은 문제지만 그 개인 자체로 보면 그렇게 작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 같아요.


헌 : 그렇겠군요.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이 그렇다면 바로 가치관 형성과도 관련이 되니까 더욱 작은 문제가 아니겠는데요.

김춘수 시비 통영서 제막. 경남도민일보 사진.


이를테면 이제는 세상을 떠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그렇지요. 저도 이 시를 한 때 좋아했는데, 그이가 전두환 대통령 독재 권력에 빌붙어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그 좋은 시가 다 싫어지더라고요. 그 때 제가 겪은 혼란이 작지는 않았지요.


6. 친독재 사과·반성해 놓고 전두환 찬양시 쓴 김춘수


주 : 반야월 선생과 김춘수 시인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저는 생각해요. 반야월은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를 했고 김춘수는 사기성 반성과 사과를 했거든요.

게다가 김춘수 시인은 1960년 마산에서 3·15의거가 일어나 그 때 희생된 젊은이들을 두고, 그들의 뿌려진 피를 두고 붉은 꽃잎에 견줘 ‘베꼬니아 꽃잎처럼이나’라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조차 시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지요.

헌 : 맞아요. 통영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김춘수 시인은 1980년 전두환 군사집단이 민주정의당이라는 정당을 만들 때 소수 정예 창당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도 모자라 민정당 전국구로 국회의원까지 지냈지요.


그러고는 그 뒤 나름대로 민주화가 이뤄진 뒤 그의 가르침을 받던 대학생들이 물러나라고 데모를 하자 자기 뜻이 아니라 강제로 하게 된 일이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주 :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기록도 보면 민정당 사무총장까지 지냈던 권정달이라는 사람의 권유로 이름을 올리게 됐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내정됐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도저히 그것까지는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극구 사양하려고 대구에서 서울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명단이 발표돼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했다는 식으로 돼 있거든요.

김춘수 사진과 그이 유품. 마산문학관 전시. 경남도민일보 사진.


헌 :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주 : 아니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반성과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할만한 상황이 그 뒤에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얘기입니다.


헌 : 그게 뭔데요?


주 : 바로 전두환 찬양시입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을 그만둘 때 썼는데요, 제목이 ‘님이시여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입니다.


7. 노예 기질 고스란히 보여주는 전두환 찬양시

헌 : 전두환 대통령이 그만둘 때인 1988년은 나름대로 민주화가 돼서 강압적으로 무엇을 시키지는 못했을 텐데, 그랬단 말이네요?

주 :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님이 태어나신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내동마을." 그러고는 1980년 집권 당시 상황을 "발등에 떨어진 불은 우선 그것부터 끄고 봐야 하듯이 우선 치안을 바로잡고 우선 인심을 안정시키고 우선 경제의 헝클어진 운행을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해 1981년 새 봄을 맞아 마침내 제5공화국이 탄생하고 님은 그 방향을 트는 가장 핵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통영 쌈지공원의 김춘수 전신상. 경남도민일보 사진.


헌 : 참 가당치도 않은 내용이네요.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수많은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은 일을 그렇게 그리다니 말입니다.


주 : 그러면서 끄트머리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님은 선구자요,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 물러남으로 이제 님은 겨레의 빛이 되고 역사의 소금이 되소서. 님이시여, 하늘을 우러러 만수무강하소서.”


헌 : 그렇군요. 김춘수 시인은 1922년 생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생이어서 나이가 아홉 살이나 적은데도 만수무강하소서, 라고 했네요.


주 : 그러니까 더 답답한 것이지요. 그 노예 기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가 아닐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헌 : 그렇네요. 이런 시를 지어놓고도 그에 앞서 민정당 창당에 참여한 것과 그 소속 국회의원이 된 것을 강압으로 했다고 했으니 누가 믿겠습니까?

8. 있는 그대로 보고 기억하고 생각하자

2012년 9월 4일 창원시와 국립마산병원의 반야월 노래비 건립 양해각서 주고받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사진.


주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같은 사과와 반성이라 해도 그것에 진정이 어려 있느냐 여부에 따라 그 무게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헌 : 노래비 건립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베꼬니아 꽃잎처럼이나 시비는 우리 마산의 3·15국립묘지에도 있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주 : 그렇게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야월 선생이 노래비가 이번에 세워지는 것을 제가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갑갑하기만 할 따름이라는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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