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동물이 더 셀까 식물이 더 셀까

김훤주 2013. 3. 9. 10:35
반응형

언젠가 이런 물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동물하고 식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센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당연히 동물이 더 세지 않느냐고, 동물은 대부분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식물을 해칠 수 있지만 식물은 동물을 그렇게 해칠 수 없지 않느냐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아니었습니다. 식물이 동물보다 더 세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은 식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식물은 동물이 없어도 물이랑 햇볕만 있으면 그리고 얼어터질 정도만 아니면 어디서나 살 수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아울러 동물은 춥고 배고프거나 어떤 위험이 닥치면 기어서든 뛰어서든 걸어서든 옮겨갈 수 있으니까 덜 완전해도 괜찮은 존재지만, 뿌리를 한 군데 붙박고 사는 식물은 그럴 수 없고 제 자리에서 온전하게 버티고 감당해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더 완전에 가깝도록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럴 듯했습니다. 제가 실증해 볼 수는 없지만 맞는 말 같았습니다. 게다가 식물은 나무나 풀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동물에게 먹이로서뿐만 아니라 산소를 만들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고 물기를 머금어 메마르지 않도록 해주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우리 인간을 비롯한 동물보다 엄청나게 센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는 사람이나 동물이 어찌어찌 해칠 수는 있지만 전체로 볼 때 동물은 식물의 생명 활동이 없으면 곧바로 죽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지요. 이런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해코지하는 존재가 바로 이런 인간을 비롯한 동물입니다.


어제 아침 출근길에 보니 이렇게 나무가 베어져 있었습니다. 메타세쿼이아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한 쪽 구석에 서 있었던 나무입니다. 제가 거처하는 데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어쩐지 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모습. 왼편 아파트 끄트머리에 하얗게 베여나가고 남은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왜 베었을까 까닭을 생각해 봤지만 알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렇게 자를 까닭이 전혀 없는데 잘랐습니다. 사람들 오가는 발길을 방해하는 자리에 놓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 이 나무는 길고 곧게 자라기 때문에, 가지가 사람들한테 거치적거리거나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테를 가만 들여다봤습니다. 많지 않았습니다. 열댓 개가 보였습니다. 매우 빨리 자라난 모양입니다. 해마다 손가락 두 개씩은 쑥쑥 자라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곁에 같이 있는 나무랑 견줘봄에, 자라는 속도가 다른 나무들보다 빨라 이런 비명횡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건, 별 쓸모가 없는데도 나무를 잘라낸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잘 모르고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지막지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의 삶을 식물의 삶을 동물의 삶이나 사람의 삶처럼, 아니 그 반의반의반의반의반 만큼이라도 생각할 줄 안다면 이런 살생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언젠가 신문에서 어떤 나무 박사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이는 나무에 대해 대학이나 연구소나 대학원에서 많이 배워서 된 나무박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이는 나무가 물을 빨아들일 때 관다발을 거쳐 물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했습니다. 그렇게 물을 빨아들일 때 나무가 기뻐서 내는 몸떨림이 보이고 내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어쨌든 이런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무 까닭도 소용도 없이 아무렇게나 나무를 베어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잘리기 전에는 해마다 손가락 두 마디씩 힘차게 팍팍 몸집을 불렸던, 열댓 살 먹은 나무의 그루터기를 향해 잠깐 고개를 숙였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