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영화 부러진 화살, 신태길 판사, 중앙일보

김훤주 2012. 1. 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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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연 판결이 합리적이었나?

동아일보는 1월 21일치 12면에 "영화 '부러진 화살' 논란…'석궁테러 재판' 피고인과 판사 만나보니"라는 제목으로 김명호 전 성균관대 조교수와 신태길 전 부장판사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김 전 교수는  "내 말은 '주장'이 아니라 명백한 근거를 가진 '사실'"이라며 "판사의 자유재량 안에서의 판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위법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석궁테러 사건에서 논란이 됐던 부러진 화살과 '피 묻은 와이셔츠'를 거론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틀렸습니다. '피 묻은 와이셔츠'가 아니라 '피 묻지 않은 와이셔츠'입니다. 안에 입었던 내복과 겉에 입었던 양복 조끼에는 피가 묻어 있는데 와이셔츠 구멍 뚫린 부분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으니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2심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신태길 변호사는 <"'합리' 하나를 20년 넘게 추구해온 길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었다"며 반박했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습니다. 이치에 합당하게(합리적으로) 판단했다는 얘기입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널리 알려진대로 현장에 있었던 부러진 화살이 그 뒤에 왜 사라졌는지와 내복과 조끼에는 피가 묻었는데 가운데 끼여 있는 와이셔츠에는 어떻게 해서 피가 묻지 않았는지에 대한 심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영화에서 신태길 부장판사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 문성근.


재판장인 심태길 당시 부장판사가 피고인과 변호인의 관련 증인 채택과 감정 신청을 기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합리'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었다니 저는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그것도 그냥 한 번 요청하고 만 사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강력하게 요청했는데도 재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 부러진 화살을 찾고 핏자국 감정만 하면 괜찮았을까?

중앙일보는 1월 25일치 34면 '권석천의 시시각각'에서 "'부러진 화살'을 찾아라"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권석천은 중앙일보 사회부문 부장의 이름입니다. 기명(記名) 칼럼인 셈입니다. 여기서 권석천 부장은 "현실 속의 석궁 교수를 미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부장판사의 집 부근을 일곱 차례나 답사한 뒤 석궁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가방 안엔 회칼이 있었다." 이에 대해 김명호 교수로서는 그렇게 했던 다른 까닭을 얘기하고 있지만 충분히 이렇게 볼 수 있는 소지를 제공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권석천 부장은 여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앞에서 저도 말씀드린 핏자국과 부러진 화살을 꼽고는 재판 과정에서 이를 면밀하게 검토했더라면 지금처럼 논란이 불붙지는 않았고 법원의 입지가 넓어졌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교수 측은 "증거 조작 가능성이 있으니 속옷과 옷에 묻은 혈흔이 부장판사의 피가 맞는지 검증해 달라"고 계속 요구한다. 재판부는 이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옷과 겉옷에 있는 혈흔 두 개가 동일한 남성의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혈흔이 부장판사의 피라는 사실을 꼭 검증해 봐야 아느냐"라는 얘기다.>


<'부러진 화살'도 마찬가지다. 부장판사의 몸에 박혔다는 그 화살이 사라졌다면 경위를 면밀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재판부로선 부러진 화살 없이도 유죄를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와 정황이 확보됐다고 판단했을 터.>


3. 석궁으로 제대로 쏘면 어떻게 될까?

물론 핏자국이 부장판사의 피와 같은지 확인하고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따져보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른바 불신이 증폭된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부러진 화살의 경우 김 교수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였기에 검찰쪽에서 일부러 숨겼을 개연성이 높아 보입니다.

부러진 화살이 피고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인 까닭은 이렇습니다. 검찰은 화살이 몸에 박혀 깊이 2cm 가량 상처를 입히고 빠져 나와 벽 따위에 튕겨지면서 부러졌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반면 피고인 김명호 교수는 제대로 발사돼 상처를 입혔다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박힌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는 석궁에서 화살이 발사됐다 해도 사람 몸에 박히지 않고 곧바로 벽 따위에 부딪혔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화살이 부러진 경위라든지 화살촉에 핏자국이 있는지 등을
살펴보면 좀더 실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07년 당시 처음 김명호 교수를 수사했던 송파경찰서는 화살을 맞았다는 부장판사의 진술을 따라 "계단 3~4개 위에서 석궁을 발사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2cm 두께인 합판을 관통한 화살이 뒤쪽으로 15cm 튀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송파경찰서는 화살을 다 끼우지 않고 중간에 걸쳐놓은, 불완전하게 장착된 상태에서 계단에 3~4개 앞에서 쐈기 때문에 2cm밖에 상처가 나지 않았다는 결론을 고민 끝에 내려서 그렇게 김 교수를 검찰로 송치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신태길 재판장의 항소심에 앞선1심에서 고영환이라는 석궁 전문가는 이를 두고 "경찰이 소설을 썼다"고 얘기했습니다. "화살 누름판에 눌리지 않은 상태에서 걸쳐 놓고 이렇게 하향 사격하면 (화살이) 흘러내리거든요."

영화 주인공 박준 변호사와 김경호 교수.


항소심에서는 당시 수사했던 송파경찰서 경찰관이 나와서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화살을 완전히 끼운 상태에서 발사를 하면 몸을 관통하기 때문에 부장판사가 입은 상처(깊이 2cm)가 도저히 나올 수 없다".


"그래서 화살이 중간에 걸쳐진 불완전 장착 상태에서 맞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고 한 번 실험을 해 봤는데 손이 조금만 흔들려도 화살이 제대로 발사되지 않았고 표적까지 도달하지도 않았다".(서형 작가가 쓴 책 <부러진 화살>의 116쪽)


4. 더욱 중요하지만 기각된 신청 하나

당시 이런 증언에 대해 검찰은 반대 신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쪽에서만 신문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것이 이상했습니다. 왜 검찰이 방어와 공격을 적극 하지 않았을까요? '그냥 무시' 전술이었습니다. 이미 결론이 유죄로 나 있었으니 옳고 그름을 두고 다툴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재판부는 석궁이 제대로 발사되면 사람 몸 정도는 쉽게 꿰뚫어 버리지만 반대로 제대로 발사되지 않으면 목표물 근처에도 가 닿지 않는다는 증언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나와서 씨부렁댄 증인들 입만 고생한 셈입니다. 이러고도 합리 타령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중요해진 석궁이 어떻게 발사되는지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석궁으로 화살을 쏘았을 때 '몸에 박혀 깊이 2cm 가량 상처를 입히고 빠져나올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당시 재판부는 김명호 교수가 제기한 석궁 실험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양복과 조끼와 와이셔츠와 내복을 입힌 돼지고기 따위에 석공으로 화살을 쏘는 실험까지 해놓고도 그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리고 판결문을 쓰기는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대법원 확정 판결로 김경호가 기결수가 된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 안성기.


5.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는 신태길 당시 부장판사

재판부는 여기에 더해 판결문에서 부러진 화살을 두고 피고인에게 불리한 물건이라고 규정한 다음 조작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피고인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물을 수사기관에서 일부러 폐기 또는 은닉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를 증거 조작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부러진 화살이 어째서 김명호 교수에게 불리한 증거물인가요? 석궁 전문가와 사건을 수사한 경찰관의 말을 따르면 발사된 화살이 부러졌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몸에 박히지 않고' 엉뚱한 데 맞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수사기관=검찰은 피고인의 범죄 혐의를 사실로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물을 숨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물을 숨길 까닭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태길 당시 부장판사가 이렇게 사실 관계를 뒤집었는데 '합리'라니요?


그래서 저는 동아일보에 나오는 신태길 당시 부장판사 인터뷰 내용 '합리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라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태길 변호사는 '합리'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6. 영화 <부러진 화살>의 리얼리티를 흠집내는 중앙일보

정지영(왼쪽) 감독과 박훈 변호사는 일관되게 영화 속 법정 장면은 100%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중앙일보 권석천 부장의 글을 두고서는 '영화 부러진 화살의 법정 안 리얼리티에 대해 흠집을 내는 기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판의 이런 과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글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란, 사건 당시 횟칼 등이 있었음을 두고 영화의 리얼리티에 문제가 있다고 한 다음 당시 재판부에 대한 자기 아쉬움을 털어 놓고는 마지막 문단에서 "법원은 영화가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 따지는 데 많은 힘을 쏟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을 이릅니다.

먼저, 석궁 가방에 횟칼이 들어 있었는지 여부는 영화 <부러진 화살>의 리얼리티와는 관계없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권석천 부장이 앞에서 밝힌 대로 '김명호 교수를 미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영화 속 법정 장면이 사실과 같은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권석천 부장은 '김명호 교수를 미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힌 바로 그 다음 단락을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자기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렇듯 영화의 리얼리티에 문제가 있지만". 전혀 무관한 두 가지를 하나로 뒤섞어 버리는 데 아주 재주가 뛰어납니다.

좀더 말씀드리자면 재판부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은 대목은 제가 보기에는 철 지난 양비론(兩非論)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발언  "법원은 영화가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 따지는 데 많은 힘을 쏟지 말기를 바란다."는 영화가 사실과 같지 않다고 한 번 더 얘기한 것일 따름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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