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매천 황현 초상은 죽고 나서 그려졌다

김훤주 2009. 12. 5. 08:39
반응형

1. 매천 황현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1855~1910)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이 초상을 물끄러미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진상(眞像)이 아니고 책에 있는 그림이었겠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무언가 모르겠는 어떤 기운이 끼쳐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 이 사람. 나라를 잃어서 슬프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잃은 마당에 목숨 하나 내어놓는 선비가 없다면 그것이 슬프다면서 목숨을 끊은 사람. 그러면서도 죽을 약을 먹기까지 몇 차례나 망설였다는 사람.'

1910년 9월 6일 밤. 전남 구례 광의면 자기 집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매천은 슬픔에 잠겨 손님을 물린 뒤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아편 세 덩어리를 소주와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매천은 동생 눈에 뜨입니다. 그 때 매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기가 쉽지는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네." 이 아픔의 깊이를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매천 황현 초상. @돌베개

매천은 죽기 전에 아들과 동생 앞으로 글도 남겼습니다. "내게 죽어야 하는 의리는 없다. 하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데도 그 고난을 위해 죽는 이가 하나도 없으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위로는 하늘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책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길이 잠들어도 참 통쾌하리라."

"새 짐승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제 망해 버렸는데/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사람 세상 글 아는 이 노릇 어렵고 또 어렵네." 이것은 그이 절명시(絶命詩) 3연입니다.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까지 만든 '글 아는 이 노릇'이란…….

2. 죽은 뒤 그려진 매천 황현 초상

그이 초상을 보면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초상은 1911년 5월 그러니까 매천이 숨을 거두고 난 뒤 그려졌습니다. 채용신이 그렸다고 합니다. 채용신은 당대 항일 투사들 초상을 많이 그린, 군수를 지낸 선비였습니다.

매천 황현 사진. @돌베개

채용신은 1909년 찍은 매천 사진을 보고 초상을 완성했습니다. 채용신은 매천의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진 속에서 매천은 잔뜩 웅크리고 있다면, 초상에서 매천은 어깨까지 활짝 펴고 있어 결연한 느낌과 당당함을 함께 풍기고 있습니다.

채용신이 굳이 매천을 골라 그리는 데에 어찌 느낌이 없었겠습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매천 초상은, 그러니까, 매천과 채용신이 감응을 해서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천의 자결에 초점을 맞춰서 말입니다.

이를 두고 <한국의 초상화>에서 지은이 조선미는 "동그란 안경 너머 생각에 잠긴 듯 앞쪽을 정시하는 시선과 비통함을 참는 듯 살짝 다문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옷깃을 여미고 숙연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고 했습니다. 매천과 채용신의 감응을 믿는다면, 어느 누구도 '옷깃을 여미고' 운운을 상투(常套)로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싶습니다.

3. 한국 초상화 : 형체를 통해 본질을 나타낸다

조선미는 <한국의 초상화>에서 "초상화란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라 정의합니다. "외적 모습(형)은 시시각각 변모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 사람만이 가진 불변의 본질 즉 정신(神)이나 마음(心)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가가 특정 인물을 그려낼 때 형을 올바로 포착해 낸다면 자연스럽게 이 형과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정신이나 마음 같은 내적 요소 역시 화면 위로 끌어 올려 영으로 비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조선미가 쓴 <한국의 초상화>는 '평범한 보통 사람을 위한 최초의 한국 초상화 감상 종합 안내서'를 자임합니다. 전시회나 도록·논문을 통해서, 또는 책 전체 가운데 일부인 단편으로 초상화 감상이 소개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한 권을 통째로 내어놓은 적은 없다는 얘기이지 싶습니다.

그래서 책은 1장 '한국 초상화의 세계'에서 한국 초상화 전반의 흐름과 아울러 우리나라 초상화의 독특한 성격을 일러주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왕의 초상', '사대부의 초상1·2', (공이 많은) '공신상', (나이가 많고 안목이 높은) '기로도상', '여인 초상', '고승 진영'으로 나뉘어 74개를 골라 꼼꼼하게 살펴본답니다.

4. 불쌍한 연잉군, 권위 있는 영조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임금이 되기 전 세자 책봉도 되지 않았던, 궁중 암투를 뼈아프게 겪고 있던 연잉군(나중 영조) 시절. "용자는 눈꼬리가 올라가고, 산근(山根:콧마루와 두 눈썹 사이)은 높으며 갸름한 얼굴인데 수척하다 할만큼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젊은 나이임에도 패기는 보이지 않고 신중하고 온유한 표정이지만 무언가 울적한 기색이 감지된다."

연잉군 초상과 영조 초상. @돌베개


연잉군이 나중에 임금(영조)이 돼서 그린 초상. "안면에는 도화(桃花)색 향기가 가득하다. 치켜 올라간 눈매를 따라 짙은 갈색 선으로 윤곽을 그렸으며, 산근 부분이 강조돼 있다. 여기에 더해 홀쭉한 몸체는 젊은 '연잉군 초상'과 마찬가지지만,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은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인상으로 변화돼 있다."

지은이 조선미가 들어 보여주는, 한국의 초상화가 바로 '형形과 영影의 예술'임을 아주 잘 일러주는 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에 매천 황현 초상에 보이는 매천 자결과 채용신의 감응이 어떻게 해서 초상으로 나타나게 됐는지와 아울러 말입니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다가 생각날 때마다 또는 필요할 때마다 들추기 딱 좋겠다 싶습니다. 형을 통해 영을, 때로는 몸서리치게 느껴보는 재미와 즐거움은 알면 알수록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돌베개. 582쪽. 4만5000원.

김훤주

한국의 초상화 - 10점
조선미 지음/돌베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