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충무공 모친 살던 집은 문화재 될 수 없다?

기록하는 사람 2009. 7. 2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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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에 가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전란 중 5년간 살았던 집 터가 있다. 1593년부터 1597년까지 거기에 사셨던 어머니 초계 변(卞守琳) 씨는 아들 이순신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후 백의종군을 위해 남쪽으로 가고 있던 1597년 4월 자신도 여수를 떠나 고향 아산으로 가던 중 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충무공의 어머니가 사시던 곳은 장군의 휘하에 있던 정대수(충정공) 장군의 집인데, 그 집 안쪽의 약간 높은 터에 따로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현재 그곳은 터만 남아 있고, 정대수 장군의 집에는 14대손인 정평호(75) 씨 부부가 살고 있다. 그 집도 상당히 고색창연한 옛집인데, 임진란 당시의 집은 아니고 후손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충무공 어머니가 살던 집 터.


난중일기에도 장군이 문안인사를 위해 이곳에 들렀던 기록들이 있다. 특히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께 인사를 고하니 '진중(陣中)에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씼어야 한다' 하시며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석별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기록에서 어머니의 곧은 성품과 장군의 효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유명한 어머니의 어록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집이다.

사실 이달 초 여수에 갔을 때 오문수 선생의 안내가 없었다면 평생 이곳을 둘러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데다, 아직 문화재로 지정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여수시청 문화재계장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그동안 네 차례나 전남도문화재위원회에 지방문화재 지정을 건의했으나 모두 반려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일시적 거처라서 지정이 어렵다'는 것이란다.


전란 중 5년이나 살았고, 충무공이 수시로 들러 문안인사를 드리고, 자고 가기도 했던 곳인데 '일시적인 거처'라니 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용했던 밥솥과 절구통도 발굴되었다는데, 더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수시가 인근 땅을 매입했고, 정대수 장군 후손이 살고 있는 집도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문화재 지정은 반려됐지만 여수시가 나서서 관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진입로도 새로 정비 중인듯 했고, 입구에 '이충무공 사모비'도 새로 건립된 듯 하다.

웅천동 송현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송현마을이다. 여수 앞바다가 보이는 곳이다. 충무공 모친이 사시던 정대수 장군 집으로 가는 길엔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참 오랜만에 탱자나무를 봤다.

내가 어릴 땐 신맛밖에 없는 이 탱자를 따서 먹기도 했다.


진입로다.  새로 길을 내고 있는 듯 했다.


이것도 근래에 세운듯 하다. '이충무공 사모비(思母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대수 장군 댁 출입문이다. 빨래가 널려 있었다.


정대수 장군 댁이다. 지금은 14대손이 살고 있다.


집의 기둥이나 서까래, 그리고 문살이 예사롭지 않다. 안주인은 낯선 여행자를 익숙하게 맞아 준다. 장군의 후손 댁에 시집온 며느리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제비가 여기 저기 집을 짓고 똥을 싸지만, 그대로 두는 여유로움도 있다. 제비집과 제비도 참 오랜만에 봤다.

장독대를 지나 안쪽 약간 높은 데에 충무공 모친이 살던 집터가 있다.


바로 이곳이다. 이 비석도 여수시에서 세운 듯 하다.

비석엔 '이충무공 모 부인 초계변씨 유적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엔 위와 같은 해설이 새겨진 석물도 있다.

충무공 모친이 살던 곳에서 내려다본 정대수 장군 댁이다. 이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


장독대와 그 위의 담쟁이 덩쿨이 정겹다.


문살에서 사대부 집안의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여느 서민의 집과는 뭔가 다른 문살이다.


처마 밑의 약간 생뚱맞은 시계에는 '국회경제과학위원장 국회의원 신순범'의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다.


장군의 후손 며느리는 나그네의 이런 저런 질문에도 싫은 기색이 없었다.


집에서 나오는데 이런 안내판도 서 있다.


집앞엔 300년이 다 된 팽나무 보호수도 있다. 이런 나무도 보호수로 지정되는데, 충무공 모친 집터는 지방문화재는커녕 문화재자료나 민속자료도 안된단다.


팽나무가 너무 커서 내 카메라 렌즈로는 다 담을 수 없었다.


사모비의 모습이다. 앞면은 이렇게 해서체이지만, 뒷면의 글씨는 행서체 또는 초서체여서 거의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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