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버스 기사 덕분에 더 즐거웠던 고성 바닷가

김훤주 2011. 10. 26. 15:59
반응형
이토록 즐거운 버스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9월 26일 오후 1시 고성시외버스 터미널에 닿아 기사식당에서 5000원짜리 정식을 먹고는 2300원으로 차표를 끊어 임포 마을을 거쳐 삼천포까지 가는 2시 출발 버스에 일찌감치 올랐답니다.

기사는 손님 자리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버스에 달린 시계가 1시 58분이 되자 신기하게도 벌떡 일어나더니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긴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사람들도 주섬주섬 타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는 시종 웃는 표정이랍니다. 요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면서 갖은 농담과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친절하게'가 아니라 '친근하게'였습니다. 덕분에 버스 안이 왁자해졌습니다.


터미널을 나서면서 누군가 자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지 입가에 웃음을 물고는 "너무 잘생긴 것도 탈이야. 사람들이 저래 좋다 캐 싸이!" 합니다. 네거리 귀퉁이에 세워진 자동차 탓에 우회전을 못하고 기다렸는데 이를 두고도 웃음 머금은 얼굴로 한 마디 뱉습니다. "이래 세우지 말라고 그래 캤는데도 이렇다 카이!"

버스를 타고 고성 임포에 가면 이런 바다가 열립니다.


모든 일에 이런 식이었습니다. 읍내를 벗어나자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최진희의 노래였습니다.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기사는 신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그러다 목이 막혀 캑캑거리기도 했습니다.


타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윗옷을 벗었습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기사, 한 마디 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할매요, 여서 옷을 벗으모 우짜란 말이요?"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달려 있고 그 웃음은 다른 손님들에게로 퍼져나갑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달리다 아예 시동을 끄고 내리기도 했습니다. 새우양식장인데 아는 집인가 봅니다. "가서요, 내 커피 좀 뽑아 오께요." 좀 있다 돌아오는 기사 양손에는 자판기 커피가 한 잔씩 들려 있습니다.

양 손에 커피를 들고 돌아오는 버스 기사 아저씨.


"마이 뽑아 올라 캤는데 기계가 딱 엥꼬가 났다." 한 잔은 자기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뒤에 앉은 할머니 한 분에게 건넵니다. 그 커피는 이리저리 돌다가 앞에서 오른쪽 두 번째 자리에 앉은 할머니에게 가서 정착했습니다.


삼산면 농협 앞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탔습니다. "아재요, 돈 찾았십니꺼?" 할아버지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둘이서 캔맥주를 놓고 마시고 있는 도롯가 정자가 나타났습니다. "야 임마 작작 좀 마셔라!" 웃음은 여전하지요. 그런데 지청구를 들은 남자는 인사치레로 급히 고개를 숙입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갯가 풍경.


길가 사람 있는 데마다 기사는 손을 흔들고 버스 바깥 사람들도 마찬가지 손을 흔듭니다. 이쯤 되면 '군의원급' 아니라 '군수급' 버스 기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가 아닌가요?


저는 기사 덕분에 내내 웃다가 2시 40분 넘어 임포 마을에 내렸습니다. 바닷가에 나가 보니 일부러 물때를 맞추지 않았는데도 썰물이 빠져 갯벌이 장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덕분에 갯잔디도 굴양식장도 제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갯가에 나와 바지락이랑 게 따위를 잡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갯잔디에 퍼질러 앉아 무엇인가 캐고 있었는데 다가가 물어보니 '함초'라 합니다. 변비 치료에 좋다면서, 집에서 약재로 쓰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한다고 일러줍니다.


보통 때는 바닷물 출렁이던 갯벌에 들어가 걷는 보람도 누렸습니다. 갯바위에는 굴들이 조그맣게 닥지닥지 붙어 있습니다. 모양새가 날렵한 돌로 껍데기를 열고 맛을 봤는데 짭조름하고도 싱싱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갯바위에 붙어 있는 굴들.

솔섬 위에 나 있는 잘 다듬어진 산책로.


한 시간 남짓 걸으니 송천리 솔섬이 나왔습니다. 솔섬은 고성군에서 조성한 생태체험학습장이랍니다. 둘레로 데크가 놓여 있고 위로는 가로 세로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진달래는 봄에 보기 좋으라고 심었겠고, 국화는 가을에 꽃 구경하라고 심은 것이겠습니다.


솔섬은 사실은 섬이 아니고 뭍에 닿아 있습니다. 대신 솔섬 앞바다에는 밀물이 들면 끊기고 썰물 때는 달라붙는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때가 맞은 덕분에 여기도 들어가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 바위들은 고성의 자랑거리 상족암 못지 않게 그럴 듯한 풍경을 보여줬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울져 일렁이는 바닷물이 상족암만 아로새기고 여기 바위섬은 그대로 내버려뒀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돌아나와 아스팔트길을 따라 걷다 곧바로 왼쪽 마을 있는 데로 꺾어들었습니다. 고연 마을입니다. 여기를 거쳐 왼쪽 도로 너머 솔숲 끄트머리에 있는 학동 마을로 갑니다.


물일 나왔다 마치고 돌아가는 할머니들이 앞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대고 있습니다. 벼들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 한가운데로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손수레를 밀거나 또는 손으로 뒷짐을 진 풍경이 걸어갑니다.


어귀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이 돌담을 보려거든 오른쪽 말고 왼쪽 길로 가라고 일러주십니다. 납작돌을 쌓아 만든 학동 돌담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여기 돌담들은 소박하다거나 품격이 높다거나 하는 느낌을 뿜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칠지는 않고, 일상 속에 그냥 들어앉아 있을 따름입니다.


한 바퀴 두르고는 들판을 가로질러 임포 마을로 나왔습니다. 횟집촌 들머리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이 고장 막걸리를 한 병 샀습니다. 길가에 앉아 마시고 있는데 고성행 버스가 5시 35분 넘어 달려오기에 급히 올라타고는 2600원을 냈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