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리영희 선생:고난 컸기에 영향력 깊고 넓다

김훤주 2010. 12. 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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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인가 사랑하는 후배 설미정이 제게 <대화>라는 책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선배가 기자라면 이런 책은 한 번 읽어봐야 하지 않나?" 이러면서 언론인 리영희(1929~2010) 선생의 일대를 담은 그 책을 제게 건넸던 것입니다.

저는 <대화>를 쉽게 읽지 못했습니다. 읽다가 몇 차례나 "어휴!" 한숨을 내쉬면서 덮었다가 다시 펼쳐 읽곤 해야 했습니다. 거기 담겨 있는 리영희 선생의 간난신고가 저로 하여금 한숨이 절로 나오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안겨준 고난 두 가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기억이 나는 대목은(그보다 더한 대목도 있지만), 해직 기자 시절 월부 책장사를 하는데 노끈으로 묶은 책 뭉치를 들고 가다가 겨울철 얼음판에서 생고생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양한 정도로 리영희 선생께서 맞닥뜨린 고난은 여러 쪽에서 왔습니다. 먼저 선생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어서 겪으셔야 했던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힘겹게 건넜던 세월이 하나입니다. 선생의 한살이는 이와 거의 완전하게 겹칩니다.

1929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국면, 그리고 참담한 6·25전쟁을 두루 겪은 세대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쯤이야 뭐 새삼스럽지 않게 여기고 넘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리영희 선생이 살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가 판치던 시절이라는 사실입니다. 

독재는 진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갖은 고초는 여기에 상당히 기인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 한 가지

앞에 두 가지는 선생이 시대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겪은 것이라면, 마지막 고난은 선생 스스로가 언론인을 선택했기 때문에 겪은 바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평생 직업이었던 글쓰기가 선생에게는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가난함은 바로 진실을 추구하는 글쓰기에서 비롯된 바가 큽니다.

게다가 글쓰기가 리영희 선생에게 즐거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글쓰기는 어떤 주의 주장을 담아내는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스스로 확보한 자료 안에서 이치에 합당하게 내리는 판단을 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제대로 된 자료를 확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글쓰기로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마무리까지 온통 고통으로 가득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하신 자백(自白)이 여기 있습니다.

"예전부터도 글이라는 것을 한 글귀 쓸 때, 한 글자 한 글자 말도 못하게 고통스러웠어. 

병으로 쓰러진 것도, 글 쓰던 것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골치를 썩히다가 머리가 말도 못하게 아팠어. 

머리가 정말 깨질듯이 아프면서 열이 확 올라오는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지. 

그렇게 쓰러져서 중풍이 된 거야."

고통을 겪고 피어난 '리영희표' 진실의 힘

이처럼 리영희 선생을 둘러싼 역사 배경도 가혹했습니다. 살았던 시대도 가혹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영희 선생 자신이 자신에게 가혹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는 힘은 진실에서 나오고 진실은 사실에 바탕하며 사실은 팩트(텍스트)와 맥락(콘텍스트)으로 이뤄집니다. 


리영희 선생은 팩트를 건져내고 맥락을 파악했습니다. 팩트와 맥락은 리영희 선생이 평생 겪으신 고통의 바다 깊숙한 데 있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남기신 영향은 선생이 몸으로 마음으로 겪고 버티고 이겨낸 고통이 없었으면 그토록 넓고 깊고 크지 않을 것입니다.

<우상과 이성>이라든지 <10억인과의 대화>가 당시는 물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빛나게 힘있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거기 담겨 있는 진실이 요즘 우리가 인터넷을 뒤적거려 찾듯이 거저 얻어낸 것이 아니고 때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갖은 어려움을 겪는 고통 속에서 어렵사리 건져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언론·언론인

이번에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나신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65세가 되어서야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보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언론인이라는 말이 무척 무겁게 다가옵니다. 1990년대 후반 리영희 선생 저작에서 '언론' 또는 '언론인'이라 하는 대신 '보도매체' 또는 '보도매체' 종사자라고 해야 맞다는 글귀를 읽은 때문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크게는 과연 언론 또는 언론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리영희 선생께서 지나치게 뚜렷하고 정확하게 당신의 일생을 걸고 보여주신 때문입니다.

저는 리영희 선생 앞에서 감히 당신을 따르겠노라는 말씀을 올리지 못합니다. 또 진정한 언론인이 되겠노라는 다짐도 하지 못합니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지난해 리영희 선생 80회 생신을 맞아 출판된 책 <우리 시대의 교양 - 리영희 프리즘>에서 리영희 선생에게 올린 글이 있습니다.

"언론인 리영희는 언론 밖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돈과 권력은 그의 영토에 둥지를 틀지 못했다. 

가족을 돌볼 만큼의 돈과 권력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매정한 아들, 아비, 남편의 기억은 곧고 청빈한 그의 땅에서 유일한 회한이다. 

그래도 언론의 길에 매진하여 진정한 문화권력을 이루었다. 
그로 말미암아 기자라는 몹쓸 직업이 그나마 빛났는데, 
지식과 양심으로 지어 올린 철옹성에서 그는 삿된 뜻이 없는 독재자다. 

여전히 범접할 후배가 없어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저는 이것이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세상을 떠나셨는데도 '여전히 범접할 후배가 없어 권좌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가슴을 치는 대목입니다.

부디 다시는 태어나시지 말기를……

저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 마당에서, 리영희 선생이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평생 그런 간난신고를 겪으셨으니까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될 만큼 업장 소멸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남은 업이 있어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면, 리영희 선생 생전에 남기신 말씀대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조용하게, 학자로 사시는 보람을 누리기를 비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국제 정세나 세계에 대한 글은 쓰고 싶지 않아. 
국제 정세라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 변화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어. 
너무나 민감하게 있어야 하니까 참 힘들었지.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고학을 해보고 싶어. 
이를테면 몇 백 년 전에 침몰한 배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를 보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그런 거 말이지."


생전에 한 번도 뵙지 못했기 때문은 진짜 전혀 아닙니다만, 저는 리영희 선생 가신다 해도 울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리영희 선생 떠나가시는 이승 마지막 끄트머리에서 선생께서 살아내신 지난 세월과 선생의 생전 말씀 몇몇을 나름대로 돌아보기만 했습니다. 

김훤주
리영희평전시대를밝힌사상의은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정치가/법조인
지은이 김삼웅 (책보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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