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우리가 낙동강을 몰라서 이런 일이 생겼다

김훤주 2010. 10. 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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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중함의 높낮이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쩌다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생물이 소중할까? 아니면 무생물이 소중할까?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이 더 소중하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물론 그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가치관과 관련돼 있기에 정답이 더욱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가치관을 갖기는 어려운 노릇이지요.

그냥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이렇게 생명이 소중하다 하면서도 파리나 모기 같은 생명체는 하찮게 여깁니다. 게다가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나 생선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들을 먹고 삽니다. 그렇게 사람이 먹어치우다보니 아주 많은 생명체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생명체들이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 죽는 고통만 생각하지 쉽지만, 전혀 아닙니다. 사는 고통이 더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몇 해 전 경남 사천 바닷가에 있는 돼지 축사를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시커멓고 커다란 돼지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돼지 똥과 오줌이 흥건했고 축사 하나에 어찌나 돼지가 많은지 제대로 방향을 틀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냄새도 지독했습니다. 더군다나 냄새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지붕과 벽은 온통 콜타르가 칠해져 있었고 창문은 두꺼운 비닐로 밀봉이 돼 있었습니다.


이런 축사에서 돼지들이 길러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 같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산다면 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돼지들이 고함을 지르는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죽을 정도로 괴롭다"는 아우성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는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돼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닭과 오리와 소 같은 숱한 가축들이 대부분 이런 고통을 견디며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경북 상주 낙동강 제1경이라는 경천대 가까운 전망대에서 본 상류 모래톱. 이제 막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얼마 안 가 저 튤립 봉오리 모양으로 예쁜 모래톱 아래 6m까지 파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이 소중하다고 하면서도 파리나 모기 같은 생명체는 하찮게 여기고 사람들이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고기나 생선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생명체를 먹는 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보고 사람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돼지에게는 돼지가 가장 소중하고 소에게는 소가 가장 소중하고 벼에게는 벼가 가장 소중하고 배추에게는 배추가 가장 소중하고 파리에게는 파리가 가장 소중하고 모기에게는 모기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소중한 존재는 없는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나름대로는 모두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함의 높낮이를 어떻게 정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만이 가장 소중하지는 않고 다른 생명체들도 가장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말씀을 하는 셈입니다.

2. 무생물이 없으면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생명체가 아닌 무생물로 얘기를 옮겨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무생물이 생물보다 덜 소중하다 여깁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무생물이 없으면 생명·생명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생물 또한 소중한 존재입니다. 물이나 공기나 햇볕은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에서 없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지만 다 무생물입니다.


또다른 무생물인 흙은 어떻습니까? 흙이 쌓여 있지 않으면 물을 머금을 수 없어서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고 사는 많은 동물들이 살 수 없습니다. 바위는 어떨까요?

바위가 없으면 흙이 저렇게 많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위가 쪼개지고 닳아서 흙이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쌓인 흙은 다시 압력을 받아 바위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 돌고도는 관계에 있는 흙과 바위가 있으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경남 합천 가회면 나무실마을에 들어가 사는 농부 시인 서정홍이 펴낸 책 <농부시인의 행복론>에 들어 있는 글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쉽게 믿기지 않고 거짓말 같기도 하지요?


"지구를 덮고 있는 흙, 이 흙 1cm가 쌓이는 데 넉넉잡아 400년이 걸리고, 콩알 반쪽밖에 안 되는 흙알갱이 속에도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이 무려 2억 마리나 살고, 흙 한 줌 속에 살고 있는 생명이 지구에 사는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답니다. 2000~3000년이 걸려야 바윗돌에서 겨우 10cm 만들어진다는 귀한 흙입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 걸작이라 한다지요."


그러니까 생명체가 소중하다는 관점에서 본다 해도, 무생물이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경천대 가까운 낙동강 상류 물 아래 알 굵은 모래들이 깔려 있습니다. 강물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잔물결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이 더 근본적인지 생각해 보면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은 사람 같은 생명체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체들은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 같은 무생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 같은 생물들은 기대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생물들은 전혀 기대지 않아도 잘만 존재합니다. '사람 중심' 또는 '생명 중심'과 같이 좁게 생각하지 않고 툭 열어놓고 무생물까지 우리 지구 구성원으로 여기고 보면 이들이 얼마나 근본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어머니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공기와 물과 흙과 햇볕은 인간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기와 물과 흙과 햇볕에 기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생물은 사실 어머니보다 훨씬 더한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언젠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공기와 물과 흙과 햇볕은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세상 속으로 구성원이 되어 들어와서는 떠날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갖은 해코지를 해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떠나지 않고 있어 왔습니다. 이런 무생물이 바로 우리를 만들어주고 유지시켜 줍니다.


그런데 이런 생물과 무생물의 관계를 가만히 눈여겨 들여다보면, 뚜렷한 특징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말미암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생물로부터 말미암아 살던 생물도 죽으면 바로 그 순간 무생물이 됩니다. 이처럼 '좀 전까지만 해도 생물이던 무생물'은 바로 생물들에게 살아가는 영양분이 되어줍니다.

식물과 동물이 죽은 위에서 풀과 나무들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립니다. 이 맞물려 있음은 바로 돌고 돎이 됩니다. 생물이 무생물이 되고 무생물에서 다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3. 습지는 '생명의 자궁'이기도 하고 '생명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맞물림'과 '돌고 돎'이 가장 잘 일어나는 데가 습지입니다. 습지는 말 그대로 축축하게 젖은 땅입니다.

이렇게 물기가 있으니까 식물이 잘 자랍니다. 식물이 잘 자라니까 식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가 많이 생깁니다.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를 먹고사는 새라든지 수달 같은 것도 당연히 생기게 마련이고, 노루나 고라니 같이 습지랑 무관해 뵈는 것들도 물을 마신다든지 해서 들락거립니다. 오랜 옛날에는 사람도 습지 둘레에 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지를 일러 걸핏하면 '생명의 보고(寶庫)'라든지 '생명의 자궁(子宮)'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그래서 소중하다는 식으로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 숱한 생명들이 영생불멸하는 존재는 아닌 만큼 언젠가는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숱한 생명들이 죽어나가는 곳도 바로 습지입니다. 그러니까 습지는 '죽음의 보고'이기도 하고 '생명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저는 습지가 소중한 진짜 까닭은 이처럼 생명의 태어남과 생명의 죽음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습지가 '생명의 자궁'이기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생명의 무덤'이기만 하면 하나도 소중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무생물에 기대어 생명체가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난 생명체가 다시 죽어 무생물로 돌아가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데라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연관, 생물과 무생물의 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활발한 땅이라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습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 연관과 순환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메마르게 됩니다. 한 번 태어난 생명체가 무생물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사라져 버린다면, 모든 생명들이 딛고 있는 땅이 메마르게 됩니다.

아무 영양분도 공급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영양분은 식물과 동물이 죽고 나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식물과 동물이 썩어문드러지지 않으면, 물이 흐르고 공기가 통하고 해가 쨍쨍 내리쬐도 영양분이 없는 땅에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콘크리트에는 그 무엇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4. 낙동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닙니다

이제 낙동강을 두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낙동강은 그 자체가 습지이면서 동시에 둘레 곳곳에 습지를 끼고 있습니다. 세계가 알아준다는 창녕의 우포늪과 창원의 주남저수지도 낙동강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습지입니다.

그래서 낙동강은 습지의 가치를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연관과 순환 그 자체라는 얘기입니다.


경천대 앞 모래톱에 꽂혀 있는 낙동강 살리기 붉은 깃발들.


물론 여기서 저는 낙동강이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긴 강인지 따위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낙동강이 우리가 익히 여기고 있는 바와 달리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히 물줄기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물줄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제 생각일 따름이지만, 하나씩 말씀을 해 보겠습니다.

'단순한 물줄기'로 여기는 인식의 대표 보기로는 '낙동강은 식수원'이라는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1000만 영남권 주민의 젖줄'이라고도 하지요.

사람들은 '식수'를 만들기 위해 낙동강에서 '원수(原水)'를 퍼내어 찌꺼기를 걸러내고 거기 들어 있는 미생물을 비롯한 생명체까지도 제거합니다. 낙동강을 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식 속에 있는 낙동강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기 흘러가고 있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낙동강은, 당연히 물줄기 그 이상입니다. 낙동강뿐 아니라 모든 강이란 강은 다 그렇습니다.

갖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살고 죽어가는 공간이기도 하며 사람들이 거기다 대고 자기 노동을 바치면서 먹을거리 등등 먹고 살 바탕을 마련하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평안함을 느끼도록 해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복잡한 물줄기'라는 뜻은 간단하게 말씀하자면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 황지 하나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낙동강에 흐르는 그 많은 물이 황지에서 흘러내린 그 물만이 아닌 만큼,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줄기의 발원지를 모두 낙동강의 발원지로 여기자는 말씀입니다. 지금 사회 현실에서 발원지를 어떤 의미로 쓰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발원지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입니다. 태백 황지는 낙동강의 유일한 발원지가 아니라 여러 발원지 가운데에서 낙동강과 바다가 맞닿는 끄트머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발원지일 따름입니다.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동쪽 골짜기에 있는 밀양강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그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단장천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밀양 재약산 산들늪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경남 거창 궁항리에 있는 황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경남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 있는 남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가사리 남쪽 계곡에 있는 금호강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습대로 낙동강이 있도록 하는 물줄기가 황지에서 발원한 물줄기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발원지가 저마다 다른 밀양강과 단장천과 황강과 남강과 금호강도 낙동강에 물을 보탭니다.

낙동강 종점에서 볼 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을 뿐 낙동강을 이루는 강물이 발원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생각을 이렇게 바꾸면, 낙동강이 훨씬 더 풍성해집니다. 예전에는 '낙동강'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태백 황지에서 부산 하단을 잇는, 남진하다가 꺾어져 동진하다 다시 남진하는 낙동강 본류뿐이어서 앙상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발원지가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물줄기마다 하나씩 있다고 생각하고나서부터는 앙상함이 풍성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다 강원도 남부 지역까지가 온통 낙동강으로 여겨집니다. 관심 영역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런 인식 전환은 현실에서도 타당합니다. 정부가 하는 낙동강 살리기 사업에서 맹점으로 꼽히는 대목이 바로 본류만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낙동강을 살리고 수질을 좋게 하려면 본류를 대상으로 하는 대신 지류를 맑고 깨끗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류를 아무리 깨끗하고 맑게 해도 지류와 지천에서 더러워진 물이 나가면 말짱 도로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낙동강 본류와 낙동강 지류·지천은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인 것입니다.

5. 정부의 '낙동강 살리기 사업'은 인간을 위한 놀이터 만들기입니다

이런 낙동강을 두고 정부가 이른바 '살리기'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함안보나 합천보 같은 보(湺)를 만들고 강바닥과 둔치를 준설하고 있습니다.

파헤쳐지고 있는 경천대 앞 모래톱.


강바닥과 둔치에서 걷어낸 준설토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 그 준설토를 처리하기 위해 이른바 농지 리모델링을 합니다. 낙동강 둘레 낮은 데 있는 논밭을 2m 이상 높이는 작업입니다.

그러면서 곳곳에 생태공원이나 전망대나 산책로나 자전거길 같은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벤트마당, 수변 무대, 다목적 광장, 피크닉장, 나루터 체험장, 자생초 화원, 농구장, 족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조형 녹지, 갈대원, 유스호스텔, 테마공원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낙동강 살리기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걱정을 합니다. 생태·환경 파괴, 농민들 생계 문제, 그리고 낙동강 수질 악화가 대표적입니다.


생태·환경 파괴는 준설하는 자체가 만들어냅니다. 준설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모래톱이나 둔치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물들을 한꺼번에 쓸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낙동강을 사람만의 것으로 보는 관점이 여기에는 들어 있습니다.

농민들 생계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제기됩니다. 먼저 준설과 개발로 둔치 농지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른바 리모델링을 한다면서 올해와 내년 두 해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한 땅이 낙동강변에 널려 있습니다.

보를 만들면서 낙동강 수위가 올라가 물에 잠기리라 예상되는 땅도 적지 않고요, 보로 물이 고이면서 생기는 안개도 농사에 악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라 합니다.


수질 악화는, 두 갈래로 예상됩니다. 첫째는 보로 물을 가둠으로써 말미암는 바입니다. 정부는 물을 그다지 많이 가두지 않고 때때로 빼기도 한다지만 어쨌든 물의 흐름이 지금보다 느려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것이 수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 또한 분명히 사실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바닥 준설 과정에서 독성 쓰레기가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1월 21일과 22일에 제각각 달성보와 함안보 건설 현장에서 시커멓게 오염된 퇴적토가 대량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은 사전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른바 낙동강 살리기 사업을 졸속으로 하다 보니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독성물질이 나왔습니다. 비소와 수은을 비롯한 일곱 가지 성분이 검출된 것입니다. 90년대 이전에는 낙동강에 갖은 쓰레기를 마구 내다버렸기 때문에 이런 오염 퇴적토가 지금 강바닥 아래에 쌓여 있습니다.

이런 것을 준설 과정에서 잘못 건드리면 1991년 구미 두산전자가 원인을 제공한 페놀 사태처럼 수질이 한 순간에 크게 나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낙동강 살리기 사업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부가 낙동강 살리기 사업을 통해 만들려는 것들은 대부분 놀이시설입니다. 놀이시설이 들어서는 데가 바로 낙동강변입니다.

낙동강변은 온갖 동·식물들의 삶터였고 많은 농민들의 일터였습니다. 그런 삶터와 일터를 까뭉개면서 사람들 돈벌이를 위해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 낙동강 살리기 사업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지금 낙동강 살리기 사업 공사 현장에 가보면 원래 거기에 뿌리내리고 살던 식물은 쓰러지고 꺾여 있습니다. 그런 풀과 나무에 보금자리를 틀었던 동물들은 사람들과 기계가 내는 소리에 이미 쫓겨나고 없습니다.

고라니나 노루 따위 그리고 때로는 멧돼지의 것들로 짐작되는 발자국들이 아직은 남아 있지만 아무래도 얼마 안 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위에 사람들에게 놀이터와 돈벌이터 구실을 하게 될 이런저런 건축물과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면 거기서 나고 살고 죽고 했던 동·식물들이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스쳐지나가고 말 공사라면, 그 공사가  제아무리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해도 자연은 스스로 깨끗해지고 스스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힘이 있기에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금 이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잘라 말하면 놀이터와 돈벌이터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정부의 낙동강 살리기 사업은 낙동강과 그 둘레를 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순환과 연관을 짓뭉개고서 말입니다.

6. 우리가 낙동강을 제대로 몰랐기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생각하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12월 당선될 때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줄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된 뒤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려다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 국면에서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그러자 '국민이 원한다면 하지 않겠다'고 꼬리를 살짝 내렸다가 2009년 접어들어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것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이 한반도 대운하 사업 그 자체는 아니지만, 두 개가 비슷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국민이 지금 이런 낙동강 살리기 사업을 하게 한 셈입니다.

국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이 낙동강을 일러 '영남권 1000만 주민의 젖줄'이라 하면서도 그 젖줄을 젖줄로 제대로 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젖줄이 사람에게 무엇인지 우리가 똑바로 새기고 있었다면 이명박씨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낙동강은 단순한 사람 젖줄 이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딱 그만큼이라도 절실하게 느끼고 알고 있지 못했다는 반증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셈입니다.

사람들이 낙동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지금 낙동강이 이런 난리를 겪고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낙동강과 그 둘레가 걱정된다면 바로 낙동강 현장을 한 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낙동강과 그 둘레 습지가 걱정된다면 바람 부는 낙동강변에 가서 흠뻑 한 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낙동강과 그 둘레에서 벌어지는 생물과 무생물의 연관과 순환이 망가질까봐 걱정된다면 바로 거기로 걸어들어가 몸과 마음을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낙동강을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늘어난다면, 지금 당장 저 난폭한 포클레인 삽질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낙동강을 원래 모습대로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만큼 하는 것입니다.


김훤주

※ 부산에서 발행되는 청소년 종합 문예지 <푸른 글터> 겨울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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