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함안 44

함안총쇄록 답사기 (14) 한 손에는 매 한 손에는 꿀

세금 못 낸 백성들 엄벌 내렸지만 속으로는 '아프냐…나도 아프다' 처벌할 때는 엄격했지만 죄수와 아전 차별 없이 별식 배급 민생고 덜고자 틈틈이 베풀기도 오횡묵의 대민 업무는 대체로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는 조세를 공정하게 거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받아내기 위해서는 족치고 때리는 형벌도 서슴지 않았지만 세심하게 보살펴 나누고 베푸는 데에도 열성을 다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정 조세와 복지 실현을 동시에 추진했다. 어쨌거나 하나는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것이어서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는 듯하다. 하지만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근본은 조세가 아닌 백성이었다.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면 일을 하기 어렵고 일을 하지 못하면 조세 내기..

함안총쇄록 답사기 (13) 군수의 파업

"결연히 떠날 수도" 원님 밀당에 양반들 화들짝 밀린 조세 4만 7500냥 걷고자 양반들에게 방편 찾아라 지시 피해 볼까 미루자 '극약 처방' 선정 베풀던 군수 떠날까 염려 수령 파업 엿새 만에 양반 백기 징수 현장 감시자 동행도 관철 양반 쥐락펴락한 뚝심 바탕에는 백성 향한 공정하고 선한 성품이 엄청나게 떼어먹은 조세 1889년 함안은 파업으로 물결쳤다. 노동자인 관노들이 파업을 벌였고 사용자인 군수도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의 파업이면 당연한 권리려니 하겠지만 사용자가 파업이라니, 130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한 상황은 아니다. 왜 파업을 했는지 내막이 궁금하다. 군수의 파업은 밀린 조세를 농간 없이 거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밀린 조세를 걷는 과정에서 아전과 양반의 장난질을 막아 백성들이 엉뚱한 손해를..

함안총쇄록 답사기 (9) 자이선·연처초연

독특한 바위와 영험한 기운 열린 광장이었던 되살려 내고픈 그 때 그 명승지 신령에 기도하던 자리 글자 새기고 단장해 개방 지금도 다수 흔적 존재 지금 함안읍성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시골 풍경이지만 130년 전에는 빼어난 명승이 있었다. 자이선(自怡墠)이다. 얼마나 멋진 곳이었을까? 을 따라가보면 그럴 듯한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갈라터진 돌등에 새겨진 전임 군수의 행적 자이선은 동헌이 등지고 있는 자리였다. 지금 함안초교와 함성중학교가 만나는 경계의 뒤편에 해당된다. 오횡묵은 1890년 6월 23일 처음 관심을 보였다. “비봉산 앞면을 보니 돌등 가운데가 갈라터져 휑뎅그렁하게 파인 것이 일부러 쪼개 깨뜨린 것 같았다.” 통인들의 대답은 엉뚱했다. “쪼개지기 전에는 부유한 아전들이 ..

함안총쇄록 답사기 (6)세시풍속 1

새끼줄 엮어 5000명 힘겨루니 천지가 들썩들썩 줄다리기로 그해 작황 점쳐 면민 25% 참가해 장관 연출 승패 떠나 놀이 즐기기도 오횡묵은 역시 기록의 달인이었다. 여태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았던 당시 풍속을 곳곳에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오횡묵은 자기가 봤을 때 새롭거나 흥미로운 것을 자세하게 적었다. 에 적혀 있는 당대 세시풍속을 보면 지금 우리한테 잘못 알려진 것도 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있다. 바로잡고 고치거나 새로 되살려야 할 것이 그만큼 된다는 얘기다. 복날에 팥죽을 먹다 팥죽은 동짓날에 쑤어 먹는다. 지금도 그렇고 에서도 그렇다. “팥죽을 끓여 삼반관속에게 나누어 먹이고 동지음을 지었다.(煮豆粥 頒饋三班 作冬至吟)”(1892. 11. 3.) 삼반관속은 관아에 딸린 아전·장교과 ..

함안총쇄록 답사기 (5) 성산산성

아라가야 점령한 신라가 쌓아 수백년 전부터 고적 인정 오횡묵 기록서도 '옛 읍터' 가치 관심 가진 흔적 보여 1991년 본격 발굴 시작해 목간·아라홍련 발견 성과 무진정·말이산고분군 등 생태역사관광 연계 가능성도 오횡묵은 성산산성을 두고 ‘옛 읍터(古邑基)’이고 ‘이름은 조남산(趙南山)’이라 했다. 그러면서 1890년 3월 2일 오전에 올라갔다. 부임 이튿날 읽은 에는 고적(古蹟)조에 ‘가야국 옛 터(伽倻國 舊墟)’로 소개되어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성터가 완연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보면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 바로 성산산성이다.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 성산산성은 1991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성을 쌓은 주체는 신라인이었고 연대는 600년대 초반이었다. 아라가야가 먼저 쌓았는 ..

함안총쇄록 답사기 (4) 함안읍성의 지금 모습은?

조 씨네 돌담 감나무밭 언덕 범상찮다 싶었더니 성벽이라네 산지 중심으로 자취 뚜렷 민가에도 일부 형태 유지 잡초·흙만 정리해도 옛 모습 회복 충분 1510년에 처음 쌓고 1555년에 다시 쌓은 함안읍성은 오횡묵 군수 시절에 이미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에 7003척이라 적혀 있고 닷새 뒤 비봉산에서 내려다보며 "넉넉잡아 5리 정도(洽爲五里許)"라 했던 많은 구간이 그랬다. 다시 1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 함안에 사는 사람들조차 함안읍성이라 하면 대부분 무너지고 허물어진 정도를 넘어 거의 없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산지에 쌓은 읍성은 대부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과 치성에 더하여 마른해자와 명문 각석도 확인이 되었다. 옛..

함안총쇄록 답사기 (1) 채원 오횡묵과 함안총쇄록

130년 전 군정 대소사 담은 수령의 흥미진진한 일기 공적 사건부터 일상까지 당시 군수 자세하게 기록 4년 역사 생생하게 담아 “역동적 활동사진” 평가 기록유산이 넘쳐나는 함안 함안은 아라가야 말이산고분군만으로도 이미 유명하지만 기록유산도 더없이 풍성한 고장이다. 첫머리에는 와 이 꼽힌다. 는 1587년 당시 군수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주동하여 136쪽 분량으로 펴냈다. 가장 오래된 현전 읍지(邑誌)로서 지역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 은 채원(茝園) 오횡묵(吳宖默)이 1889~93년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적은 일기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객관 정황에다 본인의 느낌까지 섞어가면서 수령의 하루하루를 기록하였다. 간송당 조임도(澗松堂 趙任道)가 1639년 펴낸 도 있다. 금라는 함안의 옛 이름이다. 함안 출..

늪으로 가는 생태여행 (2) 함안의 습지

취향껏 즐길 다양한 습지가 군데군데 경남 대표 습지 '질날' 눈맛 으뜸 천연기념물 '대평'엔 공존 가치 1500년 전 연꽃 피는 생태공원도 함안, 세계적인 철새 기착지 '뜬늪'처럼 작은 습지 큰 역할 물줄기 따라 볼거리도 가득 함안은 습지의 땅이다. 남강과 낙동강이 북쪽과 동쪽을 감싸 안았고 함안천과 석교천, 그리고 광려천 등 그리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곳곳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이런 물줄기를 중심으로 땅을 일구며 살아왔고 그리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노닐었다. ◇질날늪 = 함안에서 습지 경관이 가장 멋진 데는 질날늪이다. 2020년에 경남의 대표습지로 선정됐다. 안쪽으로 크지 않은 물웅덩이가 조용하게 자리 잡은 가운데 물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바라보는 풍경이 푸근하고 넉넉하다. 그..

가본 곳 2021.10.01

법수옥수홍련의 고향은 안녕하신가

함안에는 법수옥수홍련이 있다. 법수면 옥수늪에서 오래전부터 자생해 온 붉은 연꽃이라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옥수늪에서는 보기 어렵고 가야 읍내 함안연꽃테마파크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법수옥수홍련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홍련이다. 2007년 조선시대 왕궁인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 앞 연못에 연꽃을 복원할 때 채택된 것이 법수옥수홍련이었다. DNA를 조사했더니 신라 경주 안압지에 있었던 연과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 손을 타기 이전의 모습과 성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적어도 1100년 넘게 연원을 이어왔다는 얘기다. 가야시대와 이전 청동기시대에도 이 홍련은 옥수늪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현존하는 연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고유 토종이라는 역사성과 상징성이 옥수홍련에게 주어졌다. 옥수홍련은 개량을 거듭한 여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