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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 35

무소불위 '특수범죄처벌법' 살아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21일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1961년 당시 무고하게 군인과 경찰에게 연행돼 불법구금을 당하거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수천 명의 국민들이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이미 법원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승소한 민족일보 고 조용수 사장의 유가족 외에도 그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회당 최백근 조직부장과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진 신석균 경북피학살자유족회장 등 수많은 피해자의 유가족들의 재심 신청과 손해배상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소송의 범위가 얼마나 될 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

보도연맹학살사건 진실규명 잇따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 중 최대 규모로 알려진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진실이 잇따라 밝혀지고 있다. 거제유족회 서철안 회장 등 유족에 따르면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는 최근 사천(옛 삼천포 포함)과 거제·통영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또한, 마산과 창원·진해지역 보도연맹원 사건에 대해서도 이미 지난 2월 규명된 마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과 별도로 진실규명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천·거제·통영 학살사건 공식 확인 유족들이 받은 결정통지문에 따르면 사천에서는 1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각 지서에 소집돼 삼천포경찰서로 이송됐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사천군 용현..

59년만에 국방부 사과받은 유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마산 앞바다와 인근 산골짜기에서 무참히 학살된 2000여 명의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이 마침내 국가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사건이 일어난 지 59년 만의 일이다. 지난 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가 마산형무소 재소자 717명이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됐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계기로 결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회장 노치수)'는 지난 16일 오후 1시 30분 마산 종합운동장 올림픽기념관에서 '제59주기 제2차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이날 위령제에 이어진 추모식에서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향토사단의 마산대대장인 강재곤 중령이 대독한 사과문을 통해 "6·25전쟁의 와중에서 군·경에 의해 일어난 불행한 사건으로 말미암..

오빠 영정 안고 나온 81세 할머니의 눈물

지난 16일(금) 오후 1시30분부터 4시까지 마산종합운동장 올림픽기념관에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2000여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습니다. 학살된지 59년만에 열린 위령제였습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첫 위령제가 열렸으나, 이듬해 5·16쿠데타로 인해 강제로 중단된 지 49년만에 열린 제2차 위령제입니다. 이날 위령제에는 당시 23살의 나이로 학살된 오빠가 학창시절에 찍은 영정 사진을 들고 나온 할머니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임홍련(81) 할머니는 "철도 회사에 다니던 오빠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채 끌려 나가 마산 앞바다에서 학살, 수장당했다"며 울먹였습니다. 오빠의 이름은 '임홍규'라고 했습니다. 임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가 세 ..

노인들이 난생 처음 기자회견을 한 사연

아버지가 군경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 당했던 1950년, 기껏해야 한 두 살, 많아야 열 살 안팎이었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60·70대 노인이 됐다. 이른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족들이다. 그들이 생전 처음으로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 가서 기자회견이라는 걸 했다. 오늘 오후 2시에 약 20분 간 진행한 기자회견 관련 기사가 연합뉴스와 뉴시스, 노컷뉴스 등에 뜨는 걸 보니 나름대로 회견은 잘 된 것 같다. 아마 오늘 저녁엔 지역방송에도 나올 것이고, 내일쯤엔 경남도민일보를 비롯한 지역신문에도 나올 것 같다. 보름 전 쯤이었다. 마산유족회 노치수 회장이 찾아왔다. 16일(금) 오후 마산지역 합동위령제를 하는 날 마산시청에 가서 유족들의 요구사항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날..

쿠데타정권의 황당한 판결문 보셨습니까?

무조건 잡아 가둬놓고, 처벌위한 법률 만든 군사정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2조 1항) 또한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3조 1항) 이런 대한민국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내 부모 형제가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당했다. 언제, 어디서 왜 죽였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 숫자만 줄잡아 수십 만 명이다. 하지만 학살된 희생자의 유족들은 10년 동안 입도 벙긋하지 ..

49년만에 열리는 위령제 '제2회'인 까닭

1950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된 마산지역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1961년 5·16쿠데타로 중단된 지 49년만에 다시 열린다. 또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급입법으로 부당하게 옥고를 치른 민간인학살 유족회와 교원노조 간부들에 대한 명예회복도 마침내 이뤄질 전망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마산유족회(회장 노치수)는 29일 오후 경남도민일보에서 임원진회의를 열어 1961년 이후 단절됐던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오는 10월 16일 오후 1시30분 마산공설운동장 내 올림픽기념관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유족회는 또한 1960년 8월 27일 당시 마산역 광장에서 1000여 명의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노현섭(현 노치수 회장의 작은 아버지) 씨의 주도로 열렸던 제1회 위령제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49년만에 열..

드러난 암매장 유골, 어찌해야 할까요?

지난 59년간 진주시 외곽의 한 산골짜기에 암매장돼 있던 54구의 집단학살 희생자 유골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유골은 또다시 갈 곳이 없어 떠돌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지만, 국가가 그 안식처를 마련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3일에도 이 블로그를 통해 알려드렸듯이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가 무더기로 발굴됐습니다. ▷관련 글 : 김주완 '기자정신(?)' 많이 죽었다 ▷관련 글 : 학살 암매장 유골,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관련 글 : "겨우 찾은 아버지 유골 모실 곳이 없네요" 어제(30일) 오후 2시 이들 유해에 대한 현장설명회가 열렸습니다. 설명회에 많은 보도진이 다녀갔지..

"겨우 찾은 아버지 유골 모실 곳이 없네요"

진주유족회 강병현(59) 회장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학살당한 것이다. 그는 지난 6월 20일 마산유족회 창립대회 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유복자입니다. 세상에 나오니까,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가정마다 다 아버지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만 없더라고요. 지난 60년간 공산당이 싫습니다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제 나이 60입니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강 회장의 아버지처럼 1950년 7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된 사람은 경남 진주에서만 1200여 명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올해 초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했고, 당..

62살이 되어서야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에 의해 강제해산됐던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가 어제(20일) 48년만에 재창립대회를 열었다. 어제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62) 유족회장은 1950년 당시 우리 나이로 세살바기 아기였다. 그 때 아버지 노상도 씨를 잃고 평생 '아비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던 그는 62세 노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살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글이었는데, 이제야 썼으니 신문에 실을 수 있으면 싣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된다"는 문자메시지와 함께…. 당연히 신문에 게재하고, 이 블로그에도 올려 많은 분들과 그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 아버지를 얼마나 불러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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