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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횡묵 23

함안총쇄록 답사기 (14) 한 손에는 매 한 손에는 꿀

세금 못 낸 백성들 엄벌 내렸지만 속으로는 '아프냐…나도 아프다' 처벌할 때는 엄격했지만 죄수와 아전 차별 없이 별식 배급 민생고 덜고자 틈틈이 베풀기도 오횡묵의 대민 업무는 대체로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는 조세를 공정하게 거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받아내기 위해서는 족치고 때리는 형벌도 서슴지 않았지만 세심하게 보살펴 나누고 베푸는 데에도 열성을 다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정 조세와 복지 실현을 동시에 추진했다. 어쨌거나 하나는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것이어서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는 듯하다. 하지만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근본은 조세가 아닌 백성이었다.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면 일을 하기 어렵고 일을 하지 못하면 조세 내기..

함안총쇄록 답사기 (13) 군수의 파업

"결연히 떠날 수도" 원님 밀당에 양반들 화들짝 밀린 조세 4만 7500냥 걷고자 양반들에게 방편 찾아라 지시 피해 볼까 미루자 '극약 처방' 선정 베풀던 군수 떠날까 염려 수령 파업 엿새 만에 양반 백기 징수 현장 감시자 동행도 관철 양반 쥐락펴락한 뚝심 바탕에는 백성 향한 공정하고 선한 성품이 엄청나게 떼어먹은 조세 1889년 함안은 파업으로 물결쳤다. 노동자인 관노들이 파업을 벌였고 사용자인 군수도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의 파업이면 당연한 권리려니 하겠지만 사용자가 파업이라니, 130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한 상황은 아니다. 왜 파업을 했는지 내막이 궁금하다. 군수의 파업은 밀린 조세를 농간 없이 거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밀린 조세를 걷는 과정에서 아전과 양반의 장난질을 막아 백성들이 엉뚱한 손해를..

함안총쇄록 답사기 (12) 관노의 파업

아전·양반 군정 농단해 떵떵 백성은 주린 배 붙잡고 엉엉 토호 세력 조세 착복하며 활보 오횡묵 군수 '부정부패와 전쟁' 일손 차출해 10년치 장부 조사 조정, 현물서 현금 징수로 바꾸자 임금으로 받을 현물 없어져 죽을 길밖에 없다며 관노들 파업 급료 줘야할 양반들 나몰라라 혁신 강행하며 사태 뒷수습 세금은 나라 살림살이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재원이다. 지금은 국세청을 따로 두어 조세 업무를 전담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군수 같은 고을 수령에게 가장 중요했던 업무가 바로 조세 징수였다, 1889년 4월 17일 오횡묵이 부임 인사차 대구 감영을 찾았을 때 경상감사는 거짓으로 꾸민 재결(灾結=재해를 입은 농지 면적)을 실태 조사하고 밀린 조세를 받아내어 장부를 깨끗이 정리(淸帳)하는 두 가지를 토호 제압과..

함안총쇄록 답사기 (11) 낙화놀이

시가 절로 나오는 불꽃비 암벽 타고 우수수 사월초파일에 등불 달기 읍성 일대 민가에 줄줄이 멋 더하려 낙화봉 뒤섞어 마을 명소 불꽃 대량 설치 바람에 흩날려 장관 연출 일제강점기 단절 후 부활 함안에는 무형문화재가 셋 있다. 화천농악(化川農樂)·낙화(落火)놀이·함안농요(咸安農謠)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에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낙화놀이 하나다. 낙화놀이라 하면 하늘에서 불꽃이 뻥뻥 터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안낙화놀이는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경관을 연출한다. 130년 전으로 거슬러가면 함안낙화놀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속으로 들어가 그 원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성 위에 오르지 못한 첫 ..

함안총쇄록 답사기 (10) 입곡 숲안마을 연계 골짜기

수령 오횡묵의 '어쩌다 기숙 생활’ 외근 중 옆 고을서 살인사건 거처 옮기며 수사 임무 모면 주민 정성스런 대접에 감동 춘궁기 민생 파악 계기도 옥사를 피하여 입곡마을로 함안에서 오횡묵과 가장 인연이 깊은 동네는 산인면 입곡리 숲안마을이다. 계기는 살인사건이었다. 오횡묵은 여기서 열흘 넘게 묵으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주민들과 인연도 쌓았다. 골짜기에는 오횡묵의 글씨도 새겨져 있다. 살인사건 같은 중대 범죄를 당시는 옥사(獄事)라 했다. 옥사가 나면 먼저 초검(初檢)을 하고 뒤이어 복검(覆檢)을 했다. 초검 수사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 하고 복검은 제3자인 이웃 고을 수령이 초검이 맞는지 검증하는 절차였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시신을 살피는 일은 고역인데 옛날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십중팔구 몽둥..

함안총쇄록 답사기 (9) 자이선·연처초연

독특한 바위와 영험한 기운 열린 광장이었던 되살려 내고픈 그 때 그 명승지 신령에 기도하던 자리 글자 새기고 단장해 개방 지금도 다수 흔적 존재 지금 함안읍성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시골 풍경이지만 130년 전에는 빼어난 명승이 있었다. 자이선(自怡墠)이다. 얼마나 멋진 곳이었을까? 을 따라가보면 그럴 듯한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갈라터진 돌등에 새겨진 전임 군수의 행적 자이선은 동헌이 등지고 있는 자리였다. 지금 함안초교와 함성중학교가 만나는 경계의 뒤편에 해당된다. 오횡묵은 1890년 6월 23일 처음 관심을 보였다. “비봉산 앞면을 보니 돌등 가운데가 갈라터져 휑뎅그렁하게 파인 것이 일부러 쪼개 깨뜨린 것 같았다.” 통인들의 대답은 엉뚱했다. “쪼개지기 전에는 부유한 아전들이 ..

함안총쇄록 답사기 (8) 함안대군물

함안대군물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한 해 두 차례 대규모 군악의장 그야말로 장관 복장부터 절차까지 전통 양식 꼼꼼하게 기록 관련 무형문화재 전무해 학자들 "재구성·활용을" 기존 행사 연계 제안도 군물(軍物)은 전통시대 군악의장으로 보면 된다. 군물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여태까지 확인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에는 진행 순서와 절차, 복장과 양태는 물론 참여 인원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평상시에 보통 규모로 치러지는 ‘군물’이 한 차례, 특별한 때에 대규모로 펼쳐지는 ‘대군물’이 두 차례였다. 진을 치고 전투까지 연출하는 대군물 1890년 3월 14일자 에는 오횡묵 군수에게 아전들이 대군물에 대하여 “봄·가을 군사 점고 때 거행합니다” 하고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

함안총쇄록 답사기 (7) 세시풍속 2

음력 3월 끝자락엔 봄을 보내며 아쉬움 달랬다네 여름 앞두고 '전춘' 풍속 즐겨 형식 자유롭고 여러 번 열기도 전문 재인 불러 재주 놀음 관람 먹을거리 더해져 풍성한 행사로 세시풍속에 대한 오횡묵의 기록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동작이나 행동은 물론 주변 경관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더해 본인의 느낌까지 두루뭉술하지 않고 손으로 만지듯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적었다. 그 속에서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130년 전 당시 우리 지역의 민속 현장을 상세하게 알려 주는 소중한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섣달그믐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세시풍속들이 많았다.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수세에 관한 기록들이 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섣달그믐밤 뜬눈으로 새우다 지금..

함안총쇄록 답사기 (5) 성산산성

아라가야 점령한 신라가 쌓아 수백년 전부터 고적 인정 오횡묵 기록서도 '옛 읍터' 가치 관심 가진 흔적 보여 1991년 본격 발굴 시작해 목간·아라홍련 발견 성과 무진정·말이산고분군 등 생태역사관광 연계 가능성도 오횡묵은 성산산성을 두고 ‘옛 읍터(古邑基)’이고 ‘이름은 조남산(趙南山)’이라 했다. 그러면서 1890년 3월 2일 오전에 올라갔다. 부임 이튿날 읽은 에는 고적(古蹟)조에 ‘가야국 옛 터(伽倻國 舊墟)’로 소개되어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성터가 완연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보면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 바로 성산산성이다.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 성산산성은 1991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성을 쌓은 주체는 신라인이었고 연대는 600년대 초반이었다. 아라가야가 먼저 쌓았는 ..

함안총쇄록 답사기 (4) 함안읍성의 지금 모습은?

조 씨네 돌담 감나무밭 언덕 범상찮다 싶었더니 성벽이라네 산지 중심으로 자취 뚜렷 민가에도 일부 형태 유지 잡초·흙만 정리해도 옛 모습 회복 충분 1510년에 처음 쌓고 1555년에 다시 쌓은 함안읍성은 오횡묵 군수 시절에 이미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에 7003척이라 적혀 있고 닷새 뒤 비봉산에서 내려다보며 "넉넉잡아 5리 정도(洽爲五里許)"라 했던 많은 구간이 그랬다. 다시 1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 함안에 사는 사람들조차 함안읍성이라 하면 대부분 무너지고 허물어진 정도를 넘어 거의 없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산지에 쌓은 읍성은 대부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과 치성에 더하여 마른해자와 명문 각석도 확인이 되었다.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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