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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29

대통령은 '사과'했는데 장관은 '유감'인가

16일 오후 마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사과문도 발표되어 눈길을 끌었다. 위령제 자리에서 국가가 공식 사과하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권고사항'에 근거한 것이다.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 제1번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1) 국가의 공식 사과 본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부산·마산·진주형무소의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들이 계엄 하 국가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비록 계엄 하 전시상황이라 하더라도 형무소 재..

국문학자가 밝혀낸 역사의 불편한 진실

내가 지금까지 기자노릇을 해오면서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일이 '민간인학살' 문제였다.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분개하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경악할 줄 아는 한국사람들이, 그리 멀지도 않은 시기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100만 민간인학살 만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 탓으로 봐야 할까, 내 치부를 보지 않으려는 비겁한 외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체험과 그 트라우마로 인한 의도적 망각일까. 신경득 교수의 돈 안되는 연구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학살자의 자식들이 '좌익으로 몰..

학살 암매장 유골,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진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중·하순경 국민보도연맹원과 진주형무소 재소자 1200여 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 암매장된 지 59년만의 일이다. 김해 봉하마을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 49재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10일이었다.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 감나무밭 일대에서 유해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남대박물관 발굴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이 이날 오전 매장추정지를 약 10cm 정도 파들어가자 곧바로 앙상한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러난 3~4구의 유해 옆에서 M1 소총의 탄피도 발견됐다. ※관련 글 : 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이곳은 현재의 토지소유주가 지난 80년대 초 감나무 과수원 용도로 땅을 ..

김주완 '기자정신(?)' 많이 죽었다

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나는 매주 월요일자 신문의 17면(기획면) 한판을 채워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때그때의 이슈를 취재해 기획기사를 출고하거나 '김주완이 만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내고 있다. 지난 금요일(10일) 알고 지내는 '민간인학살 진주유족회'의 한 회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유해발굴 현장에서 유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명석면 용산리에서 진행돼왔던 발굴은 사실상 실패했다. 그런데 문산읍 상문리에서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다음날인 11일 현장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주 월요일자 기획을 그걸로 잡기로 했다. 다음날 마침 진주 가는 후배의 차를 얻어타고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에 도착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

62살이 되어서야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에 의해 강제해산됐던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가 어제(20일) 48년만에 재창립대회를 열었다. 어제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62) 유족회장은 1950년 당시 우리 나이로 세살바기 아기였다. 그 때 아버지 노상도 씨를 잃고 평생 '아비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던 그는 62세 노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살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글이었는데, 이제야 썼으니 신문에 실을 수 있으면 싣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된다"는 문자메시지와 함께…. 당연히 신문에 게재하고, 이 블로그에도 올려 많은 분들과 그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 아버지를 얼마나 불러 보고 ..

아버지와 숙부의 한 풀겠다는 60대의 사연

60대 이상의 마산시민 중 '노현섭'이라는 이름을 모른다면 그는 마산토박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도 그를 모른다면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50~60년대 노동·인권운동가 노현섭 그로 말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마산의 바웬사' 같은 인물이었고, 일찌기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하고 전국적인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였다. 노현섭(1920~1992) 씨는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이후 마산상고를 거쳐 용마고등학교로 바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59년 전 아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할머니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어 평생 혼자 살아온 83세 여성노인에게 가장 아쉽고 절실한 것은 뭘까? 황점순(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할머니에게 그것은 '혈육'이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적군도 아닌 아군에 의해 남편 이용순과 아들 상섭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 24세, 아들은 고작 2세였다. 남편은 그해 7월 15일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민간인학살 현장에서 잃고 말았다. 국가가 남편의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해준 것은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2009년 2월말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서 '이용순(李鏞淳)'의 이름을 찾아줬던 것이다. 물론 국가가 ..

봄향기 가득한 할머니의 겨울초 비빔밥

지난 2일에 이어 토요일인 어제(7일) 다시 마산 외곽의 진전면 곡안리에 사시는 황점순 할머니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전 기사 :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 할머니의 눈물 그날 "먹고 싶은 게 뭐냐"는 저의 집요한 질문에 할머니는 "한약을 먹어보고 싶다"는 뜻을 비췄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마산 산호동에서 '이병직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병직 원장이 할머니를 진료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구자환 기자를 꼬셔(저는 차가 없거든요. ㅎㅎ) 할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점심을 먹고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냥 나오려던 저희들을 붙잡으신 할머니는 그동안 뒤뜰에서 정성스레 길러온 겨울초(冬草) 어린 순을 뜯어 비닐봉지 두 개에 가득 담았습니다. 오전에 겨울초 사진을 찍어두었는데, 그 때 보..

맛집 기행 2009.03.08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 할머니의 눈물

마산과 진주·부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은 오늘(2일) 오전이지만, 사실 저는 유족을 통해 미리 결정통지문을 입수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발표가 나온 날, 제가 아는 희생자 유족 가운데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 60년 가까이 핏줄 한 명 없이 평생 홀몸으로 살아온 황점순 할머니댁을 구자환 기자와 함께 찾았습니다. 뚜렷한 취재계획은 없이 그냥 할머니를 뵙고 싶었습니다. 황점순(83) 할머니는 제가 1999년 10월, 처음으로 마산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보도할 때 만난 후 지금까지 10년간 교류해..

민간인학살 유족 사찰 '극비문서' 있었다

김해경찰서, 작성해 유족 감시 확인 경찰이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보도연맹원 뿐 아니라 그들의 유족에 대해서도 일일이 성향 분석을 하면서 감시·관리해왔다는 사실이 '극비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김해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272명에게 결정 통지한 '진실규명 결정문'에 따르면, 경찰은 1950년 학살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이른바 를 작성해 유족들을 감시해왔다. 김해경찰서 정보과가 1972년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는 '6·25 당시 처형자 및 동 연고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여기에는 1950년 살해된 201명의 성명·본적·주소·생년월일·성별은 물론 연고자(유족) 간의 관계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특히 연고자란에도 성명·본적·주소·직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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