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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9

경남신문의 베껴쓰기 넘은 훔쳐쓰기

나는 경남도민일보 기자다. 경남신문 기자들과 같은 업계에 종사한다는 말이다. 나름 사정도 짐작이 되고 여러 어려움도 같이 느낀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3월 26일 일요일 사람 만날 일이 있어 마산 창동 한 카페에 갔다. 시간이 남았기에 거기 있는 경남신문(3월 24일 금요일치)을 뒤적이다가 4면에 눈이 머물렀다. 이런저런 기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아홉 꼭지였다. 한 기자가 그 가운데 네 꼭지를 썼다고 되어 있었다. 비중이 높은 머리기사와 두 번째 기사와 세 번째 기사 그리고 조그만 기사 하나가 그이의 몫이었다. 머리기사는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일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아마 호남?)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사는 발생 장소가 서울과 대전으로 서로 달랐다. 기자 한 명이 두 현장을 동시에 찾아갔고..

87년 6월 10일 경남엔 무슨 일이 있었나(2)

경찰·행정·정당, 그리고 언론에 분노 폭발 6·10마산대회의 절정은 마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국제축구대회가 최루탄으로 인해 중단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산대회는 국내·외 관심의 초점이 됐다. 오후 6시30분 마산 창동 코아제과 앞 도로를 거쳐 육호광장으로 진출하던 시위대는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투석으로 돌파하고 일시에 광장을 점거했다. 박영주씨의 기록에 따르면 이 광장에서 시위대는 어디로 갈 것인지 잠시 논란을 벌였던 것으로 돼 있다. 만일 시위대가 운동장 쪽으로 가지 않고 마산역 방향으로 갔더라면 이날 시위는 싱겁게 마무리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운동장 쪽을 택했다. 87년 6월항쟁의 역사 중 17일 경상대생의 남해고속도로 LP 가스차 탈취사건과 함께 전국의 시위 열기에 가장 큰 영향..

경남신문 상대 500만원 소송을 낸 전말

1. 경남신문 간부 한 분의 적반하장 8월 어느 날 저희 공장 선배 한 분한테서 경남신문 편집국 간부 한 사람이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만난 그 경남신문 간부가 저를 두고 무어라 비판을 했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경남신문이 제가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을 표절한 데 대해 공공연하게 문제 제기를 한 데에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선배한테 여쭙지 않았습니다. 들어봐야 귀만 더럽힐 뿐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잘잘못을 생각해 봅니다. 표절을 당한 저는 피해자고 표절을 한 경남신문은 가해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은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한테 사과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2. 여태 반응이 없는 경남신문 편집국장과 대표이사 회장 물론 해당 기자 개인의 잘못도 있겠지..

표절한 경남신문과 '갈등의 사사화'

경남신문이 5월 26일치 신문 1면에서 제가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표절해 관련 글과 함께 실은 데 대해 '경남 대표 언론'이 표절이나 일삼다니 http://2kim.idomin.com/1932라는 글을 같은 날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경남신문의 담당 데스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 운전 중이어서 길게 통화하지 못했던 저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이번 일은 가해와 피해를 기준으로 삼아 봐야 하는 문제로 본다',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시 6월 9일 경남신문 회장과 편집국장에게 보낸 편지 http://2kim.idomin.com/1942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같은 달 7일 우편으로 내용 증명을 보낸 일을 두고 ..

경남신문 회장과 편집국장에게 보낸 편지

5월 26일에 저는 경남신문의 제게 한 잘못을 밝히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경남 대표 언론'이 표절이나 일삼다니(http://2kim.idomin.com/1932)입니다. '경남 대표 언론'을 자임하는 경남신문이 제 블로그에서 글과 사진을 표절하고 도용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에 어떤 분이 주신 댓글 아래에 한 주일 정도 경남신문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겠다는 글을 달았는데 제가 댓글을 달아올린 경남신문의 해당 부서 데스크가 전화를 해 오기는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지금 말씀드리기는 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은데, 다만 저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이번 일은 가해와 피해를 기준으로 삼아 봐야 하는 문제로 본다',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고 했습..

'경남 대표 언론'이 표절이나 일삼다니

경남신문이 5월 26일치 1면에 '사천·삼천포 통합 앙금'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부제는 '도심 현수막 등에 적힌 사천 글귀 훼손 잇따라'와 '시의회·상공회의소·시민단체 지역 갈등도 여전'으로 돼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전용 주차장 무료'를 알리는 펼침막에서 사천시장을 삼천포시장으로 바꿔놓은 사진을 함께 넣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에는 이보다 큰 사진이 들어 있는데, 두 사진을 견줘보면 인터넷신문 사진을 잘라내어 종이신문 사진으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사에는 "'사천시장'을 삼천포시장'으로 바꿔놓거나 '삼천포 사랑하세요 잊지 마라 삼천포' 등의 글귀를 관공서의 건물벽과 담장, 표지판, 헌옷 수거함 등 눈에 잘 띄는 곳에 적어놓기도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표현이 제가 저..

사이판 총기난사, 해결노력은 계속된다

사이판 총기난사 사건 피해자의 원통한 사연이 경남도민일보와 시사인, 그리고 20여 명의 '동맹 블로거'들에 의해 이슈화한 지 한달 보름(45일)만에 경남의 또다른 지역신문인 경남신문에 상자기사로 보도됐다. 사실 그동안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가 경남 마산의 학원강사 박재형(39) 씨였고, 함께 피해를 입은 그의 친구들도 모두 부산과 울산 등 인근지역 사람들이었음에도 경남도민일보를 제외한 부산·경남 지역언론의 침묵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블로그와 네티즌들의 노력에 힘입어 MBC뉴스데스크를 필두로 SBS큐브와 KBS창원의 시사 @ 경남, 그리고 케이블TV인 CJ경남방송까지 시사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음에도 경남신문과 경남일보 등 지역신문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만 지켰다. ☞뉴스데스크 : 사이판 총기사..

87년 6월항쟁때 기득권층은 뭘 했을까

1987년 4·13 호헌조치에서부터 6·29 대국민 항복선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적인 분노가 불타오르던 시기,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뭘하고 있었을까. 전두환의 4·13 호헌 발표가 있던 그날 유일한 지역신문이었던 의 1면은 '현행헌법으로 내년 정부 이양' '고뇌에 찬 역사적 결단' 등 기사로 도배됐고, 사회면 머리기사도 '안보·안정 다지는 불가피한 조치' 였다. 그 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의 보도도 정권옹호 일색이었다. 항쟁 불타오르는데 꽃씨 뿌리기 행사? 15일자 사회면은 '개헌논의 빙자 불법행동 엄단, 김 법무 지시 전국 공안검사 비상근무체제 돌입, 중범자엔 법정최고형 구형'이란 기사가 나왔는데, 그 옆에는 '봄맞이 대청소'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려 있다. 비상한 시국에 비해 참으로 한가롭..

조두남·장지연도 친일파 "이를 어쩌나"

가곡 의 작곡가 조두남과 작사자 윤해영,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주필 등이 친일파에 포함됐다. 조두남의 경우 마산시가 '조두남기념관'을 건립하려다 시민단체와 언론의 거센 반발로 '마산음악관'으로 이름을 바꾼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가곡 를 상징하는 각종 조형물이 마산에 남아 있어 철거논란이 격화될 전망이다. 또 장지연도 한동안 언론인의 표상으로 경남지역 각 신문사 기자회가 매년 신문의 날(4월 7일)에 묘소를 참배해 왔다. 그러나 몇 년 전 가 그의 친일 논설을 보도한 이후 와 이 참배를 중단했다. 대신 는 3·15의거 희생자 묘역을, 은 자기 회사 사장을 지낸 목발 김형윤 선생 추모비에 참배해 왔다. 그러나 는 자기 회사 주필을 지낸 장지연의 묘소 참배를 계속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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