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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국수 9

송미영 이야기(11)다시 잡은 가야금

미영 씨가 가야금을 다시 잡았다. 지난 3일 옛 스승이었던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으로부터 호통을 들었던 바로 그날 저녁부터였다. 조 관장은 "너 가야금 줄이 그게 뭐냐? 신문에 난 (가야금) 사진 보니 기가 막히더라. 내가 어떻게 가르쳤어? 가야금 줄 항상 가지런히 매어 놓는 것부터 가르쳤지?"라고 나무랐다. 그날 밤 식당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려 있던 가야금을 내렸다. 한 때 고급 한정식 집에서 그녀가 가야금을 배웠다는 말을 듣고 "손님들 앞에서 한복 입고 가야금 연주를 해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단번에 거절했던 미영 씨였다. "그건 제게 가야금을 배워준 선생님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그녀는 흐트러진 채 방채해뒀던 가야금 줄을 다시 맸다. 그러나 두 대의 가야..

송미영 이야기(10)식당에 곱배기가 없는 까닭

그 때가 2010년 5월이었다. 허리 수술을 받은 후 병원에 누워 지나온 삶을 곰곰히 반추해봤다. 거기에 송미영 자신의 삶은 없었다. 그동안 남동생 둘은 물론 남편과 아버지까지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막내 애영 씨는 물론 딸이었다. 미영 씨가 인고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걸어온 일종의 최면이었다. 치매에 걸려 미영 씨 집에 온 할머니와 오랜 병수발을 들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1년 여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북 구미에서 모셨던 시아버지까지…. 이제 자신의 삶을 찾고 싶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창원소상공인지원센터를 찾았다. 거기서 창업교육을 받으면서 호호국수를 구상했다. 우선 곱배기 메뉴를 따로 두지 않고 누구든 먹고싶은 만큼 배불리 먹이고 싶었다. 적어도 내 집에 온 손님은 국수든 밥이든..

카테고리 없음 2011.07.05

송미영 이야기(9)냄새도 맡기 싫은 중국음식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중국음식점을 차렸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다. 평소 요리 솜씨가 있는 사람이라도 중국음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따로 배워야 했지만, 월급을 200만~300만 원씩이나 주면서 고용한 요리사는 절대 요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1년 후, 장부를 정리해보니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남았다. 결론은 요리사 인건비 때문. 안 되겠다 싶어 미영 씨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너댓 살밖에 안 된 아들은 뒷전에 두고 주방에서 설겆이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요리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자 요리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미영 씨의 손목이 워낙 약해 후라이팬을 돌리는 건 무리였다. 남편 도연 씨도 주방에 투입됐다. "주방도 맡고, 배달도 했죠. 보통 중국집과 달리 우리는 새벽까지..

송미영 이야기(8)착하게만 살진 않았다

지금까지 미영 씨의 희생적인 삶이 주로 소개됐지만, 그녀가 오로지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삶도 결코 평탄하진 않았지만, 아들(13·현재 중학교 1학년)에게도 평생 씼을 수 없는 고통을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조순자 선생과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 병석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영 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빈소에 줄을 이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앵벌이 장애인들의 대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미영 씨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비로소 어머니의 병수발에서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몇 개월 후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덕분에 양 손목이 없는 아버지와 장애인들 뒤치다꺼리에서도 해방될 ..

송미영 이야기(7)조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미영

이쯤에서 미영 씨를 수양딸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조순자 관장이 어떤 인물인지 기록해둘 필요가 있겠다. 국내, 아니 세계에서 유일한 가곡전수관 입구에 적혀 있는 조 관장의 이력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전수관장 조순자(曺淳子), 호 : 영송당(永松堂), 생년월일 : 1944년 8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나 1959년 중앙방송국(현 KBS) 국악연구생 2기생으로 선발되어 국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주환, 김천홍 등에게 가무악의 실기와 이론을 수학한 후 1962년부터 국립국악원 연주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립국악원 첫 해외연주인 1964년 도일 공연에서 연주하는 등 활약하다가 1968년 인화여고 국악반을 지도하기 위해 교사로 전직한 후 1970년 결혼과 더불어 마산으로 귀향하였다. (…중략…) 1973..

송미영 이야기(6)23년만의 재회

23년동안 맺혀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뭐라고 울부짖는 듯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옛 제자는 그렇게 한참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67) 가곡전수관장이 지난 3일 오후 3시 20분 창원시 성산구 내동 호호국수 송미영 씨를 찾아갔다. 23년 전 수양딸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순자 관장과 미영 씨의 사연이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바로 그 날이었다. 상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호국수의 단골이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회원인 손민규(45) 씨가 조 관장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사장님, 조 관장님 오셨는데요." 그 말에 놀라 주방에서 나오던 미영 씨의 다리가 휘청했다. 털썩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조 관장이 그녀를 부축..

송미영 이야기(5)가곡명인 조순자 선생과의 인연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에 있는 미영 씨의 집 현관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묵직한 장식품(?)이 둘 있다. 벽에 세로로 걸려 있는 가야금이다. 자세히 보니 그냥 장식용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가야금이다. 국숫집 주인 집에 웬 가야금일까? 미영 씨는 고등학교까지 자퇴한 후 1년 넘게 엄마 병 수발과 장애인들 뒤치닥거리에 매달렸다. 그런 미영 씨 덕분에 당시 코흘리개였던 막내 애영(30) 씨도 탈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남동생 둘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벌써 23·4년 전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 송병수 씨는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 때문에 장녀를 희생시킨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미영 씨가 열 아홉 되던 해 어느날 '큰 딸을 저렇게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송미영 이야기(2)떠돌이 막노동꾼을 내 남자로 선택하다

미영 씨의 남편 김도연(43) 씨는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한 조선업체의 하청업체, 거기서도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돈내기(도급제)'로 일한다. 그래도 나름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조선업계의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미영 씨의 피같은 돈 5000만 원을 떼먹고 달아난 사기꾼 덕분(?)이었다. "내가 용접을 해봤잖아요. 용접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더라고요. 대신 설계도면을 보는 게 진짜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미영 씨가 남편을 기술자로 키워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쯤 사기꾼이 접근해왔다. 조선기술을 배우면 남편을 호주의 조선소에 취직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그 때 남편 도연 씨는 남의 식당에서 음식 배달을 하고 있었다. 사기꾼은 도연 씨를 진해의 조선 협력업체에..

송미영 이야기(1)의리 때문에 포기한 정규직의 꿈

이 글은 지난 5월부터 6월 13일까지 총 11회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에 '작지만 강한 여자 송미영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이다. 경남도민일보에 연재되는 동안 과분한 관심과 격려, 그리고 질정을 받았다. 블로그 독자들과도 공유하고 싶어 이곳을 통해 연재한다. 송미영(42) 씨. 1969년생 닭띠. 키 155cm에 48kg의 가녀린 체구이지만, 그녀의 말과 표정, 눈빛에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봐버린 사람만의 내공과 포스가 느껴졌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그녀가 '까르르' 소녀처럼 웃을 때에도 그 포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을 고통스러운 자신의 과거마저 그녀에겐 아름다운 추억이 된 듯했다. 지금 그녀는 창원시 성산구 내동에서 '호호국수'라는 19평의 식당을 소유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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