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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영 이야기 7

송미영 이야기(11)다시 잡은 가야금

미영 씨가 가야금을 다시 잡았다. 지난 3일 옛 스승이었던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으로부터 호통을 들었던 바로 그날 저녁부터였다. 조 관장은 "너 가야금 줄이 그게 뭐냐? 신문에 난 (가야금) 사진 보니 기가 막히더라. 내가 어떻게 가르쳤어? 가야금 줄 항상 가지런히 매어 놓는 것부터 가르쳤지?"라고 나무랐다. 그날 밤 식당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려 있던 가야금을 내렸다. 한 때 고급 한정식 집에서 그녀가 가야금을 배웠다는 말을 듣고 "손님들 앞에서 한복 입고 가야금 연주를 해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단번에 거절했던 미영 씨였다. "그건 제게 가야금을 배워준 선생님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그녀는 흐트러진 채 방채해뒀던 가야금 줄을 다시 맸다. 그러나 두 대의 가야..

송미영 이야기(10)식당에 곱배기가 없는 까닭

그 때가 2010년 5월이었다. 허리 수술을 받은 후 병원에 누워 지나온 삶을 곰곰히 반추해봤다. 거기에 송미영 자신의 삶은 없었다. 그동안 남동생 둘은 물론 남편과 아버지까지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막내 애영 씨는 물론 딸이었다. 미영 씨가 인고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걸어온 일종의 최면이었다. 치매에 걸려 미영 씨 집에 온 할머니와 오랜 병수발을 들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1년 여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북 구미에서 모셨던 시아버지까지…. 이제 자신의 삶을 찾고 싶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창원소상공인지원센터를 찾았다. 거기서 창업교육을 받으면서 호호국수를 구상했다. 우선 곱배기 메뉴를 따로 두지 않고 누구든 먹고싶은 만큼 배불리 먹이고 싶었다. 적어도 내 집에 온 손님은 국수든 밥이든..

카테고리 없음 2011.07.05

송미영 이야기(8)착하게만 살진 않았다

지금까지 미영 씨의 희생적인 삶이 주로 소개됐지만, 그녀가 오로지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삶도 결코 평탄하진 않았지만, 아들(13·현재 중학교 1학년)에게도 평생 씼을 수 없는 고통을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조순자 선생과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 병석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영 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빈소에 줄을 이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앵벌이 장애인들의 대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미영 씨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비로소 어머니의 병수발에서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몇 개월 후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덕분에 양 손목이 없는 아버지와 장애인들 뒤치다꺼리에서도 해방될 ..

송미영 이야기(6)23년만의 재회

23년동안 맺혀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뭐라고 울부짖는 듯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옛 제자는 그렇게 한참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67) 가곡전수관장이 지난 3일 오후 3시 20분 창원시 성산구 내동 호호국수 송미영 씨를 찾아갔다. 23년 전 수양딸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순자 관장과 미영 씨의 사연이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바로 그 날이었다. 상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호국수의 단골이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회원인 손민규(45) 씨가 조 관장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사장님, 조 관장님 오셨는데요." 그 말에 놀라 주방에서 나오던 미영 씨의 다리가 휘청했다. 털썩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조 관장이 그녀를 부축..

송미영 이야기(5)가곡명인 조순자 선생과의 인연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에 있는 미영 씨의 집 현관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묵직한 장식품(?)이 둘 있다. 벽에 세로로 걸려 있는 가야금이다. 자세히 보니 그냥 장식용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가야금이다. 국숫집 주인 집에 웬 가야금일까? 미영 씨는 고등학교까지 자퇴한 후 1년 넘게 엄마 병 수발과 장애인들 뒤치닥거리에 매달렸다. 그런 미영 씨 덕분에 당시 코흘리개였던 막내 애영(30) 씨도 탈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남동생 둘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벌써 23·4년 전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 송병수 씨는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 때문에 장녀를 희생시킨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미영 씨가 열 아홉 되던 해 어느날 '큰 딸을 저렇게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송미영 이야기(4)이모의 폭력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한 아동폭력이며 학대였다. 미영 씨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였으니 벌써 30년이 넘은 이야기다. '앵벌이'로 전국을 떠돌던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미영 씨 남매를 돌보던 이모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막내 애영 씨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미영 씨와 두 남동생은 이모와 함께 마산 내서읍 중리의 경노당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었다. 아홉 살밖에 안 된 미영이가 경노당 청소와 빨래를 도맡은 것도 모자라 걸핏하면 이모에게 매질을 당했다. "경노당에 창문이 많았어요. 그 많은 창문을 다 걸어잠그게 했어요. 그리고 나서 동생 둘을 밖에 내보낸 후, 빨래나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았다며 허리띠를 손에 감고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렸어요. 동생들은 문밖에서 '우리 누야 살리주이소'라며 ..

송미영 이야기(3)팔도 없고 눈도 없이 살아남는 법

미영 씨가 혹독한 시집살이와 노동으로 거의 탈진할 때쯤이었다. 불쑥 친정 아버지가 구미의 시댁까지 찾아왔다. 어젯밤 꿈에 딸이 나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딸의 앙상한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는 사돈 양반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딸 가진 죄인이 딸 데리러 왔습니다." 그 길로 딸의 등을 떠밀어 마산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애초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는데 부정적이었던 남편 도연 씨도 곧 뒤따라왔다. 아버지 송병수(65) 씨는 5살 때, 아니 정확하게는 만 4세 때 폭발물 사고로 양 손목과 두 눈을 잃은 중증 장애인이다. 송병수 씨를 만나러 가는 동안 뭔가 음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호탕하고 밝았다.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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