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용어 중에 '의도적 망각'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을 일부러 잊어버리려는 인간의 본능을 뜻한다. 내가 만난 그런 사람들 중에는 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나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이 많았다. 1997년에 만났던 '훈' 할머니도 그랬다. 열 여섯 나이에 왜놈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는 온갖 치욕과 고통 끝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캄보디아 원주민들 사이에 숨어 연명해왔다. 해방 52년만에 한국인 사업가를 만났으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만 기억할뿐 한국말은 물론 아버지·어머니와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97년 여름 할머니의 혈육찾기 취재에 나선 기자들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