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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4

정자의 공자 그림과 성당의 예수 수난 그림

선조를 업어 피란시킨 장만리공자의 일대(一代)를 그린 그림들이 함양 화림동 계곡 동호정에 가니까 붙어 있었다. 동호정은 기록을 보면 장만리(章萬里)라는 인물의 후손이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1890년대 지었다. 동호정(東湖亭)에서 동호는 장만리의 호(號)라고 한다. 장만리는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蒙塵)할 때 십수리를 업어간 공적이 있다고 한다. 장만리는 그 덕분에 전쟁이 끝나고 호성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정작 본인은 이를 못 누리고 1593년 마흔 나이로 피란 도중에 죽기는 했지만. 임금의 피란을 뜻하는 몽진은 먼지(塵)를 덮어쓴다(蒙)는 말이다. 몽진은 임금이 겪어서는 안 되는 특별한 위기 상황이다. 봉건시대 임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먼지나 티끌조차 뒤집어써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

원균은 정말 나쁘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칠천량해전 하면 원균이 떠오르고 원균 하면 무능하고 이순신 장군을 괴롭힌 나쁜 사람이라는 규정이 항상 따라붙는다. 그런데 원균이 정말 그토록 무능하고 나쁜 사람이었을까는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영이 전멸한 가운데서도 적극 나서 왜군을 막았고 이순신과 합동 전투도 치렀다. 우리한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뒤로 숨는 용렬한 지휘관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순신과 견주어서 능력을 평가하면 무능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게다가 능력을 떠나 주어진 조건만 비교해도 원균은 이순신보다 불리한 점이 많았다. 이순신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나름 전란에 대비할 시간이 넉넉했다는 얘기다. 하..

대통령을 임금으로 둔갑시킨 못난 유권자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임금을 따라다니며 모신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왜적을 무찌른 여러 장수들과 군사·양곡을 보내달라고 명나라에 아뢴 사람은 선무공신으로, 1596년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사람은 청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앞자리가 호성, 그 다음이 선무, 가장 아래가 청난이었습니다. 1604년 6월 25일치 을 보면 호성공신은 1등 3명 2등 31명 3등 53명으로 모두 86명입니다. 선무공신은 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으로 18명입니다. 청난공신은 1등 1명 2등 2명 3등 2명으로 5명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왕조 시대 임금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도 백성도 아니었고 자기자신의 ..

임금도 탄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

류성룡의 징비록, 백성 버린 선조를 고발하다 1. 류성룡(1542~1607)이라 하면 세상 사람들은 전란에 앞서 이순신과 권율을 장수로 추천한 재상으로 압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동시에, '오성'과 '한음'으로 이름난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의 존경스러운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맞는 말입니다. 에도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이 무엇입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류성룡이 썼습지요. 전쟁에 앞선 일도 가끔 적혀 있는데요, 이는 난리의 발단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 징비(懲毖)란, 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대목이랍니다.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가네(其懲而毖後患)"에 징과 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은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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