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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9

산골 담벽에는 어떤 광고가 있을까

지리산 기슭의 경남 함양군은 산골이 깊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지리산과 덕유산이 걸쳐 있는 이곳은 1950년 6.25전쟁이 나기 전부터 빨치산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바람에 군경토벌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학살이 발생된 곳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 지역 주민들은 그런 지리산이 원망스러웠던 나머지 '지리산을 통째로 떠서 동해바다에 빠뜨려버리면 좋겠다'는 푸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란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지 못한 채 산골짜기에 노인들끼리 모여 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99% 도시로 떠나고 없습니다. 노인들만 사는 산골마을 담벽에는 어떤 광고들이 있을까요? 우선 간첩 신고 구호입니다. '꾸준히 살펴보고 제 때에 신고하자'는 말은 신분을 위장한 채 주민들 속에 숨어 살..

가본 곳 2009.02.04

"왜놈 순사보다 경찰이 더 무서웠어요"

일제 강점기의 징병과 징용, 그리고 해방 직후의 미 군정과 좌-우익 대립, 한국전쟁과 빨치산 토벌 등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인 말씀이 하나 있다. 인민군보다 더 무서운 게 빨치산이었고, 빨치산보다 더 무서운 건 지방좌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빨치산이나 지방좌익보다 훨씬 무서운 건 대한민국 경찰이었다고 한다. 특히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대한민국 경찰은 일제 강점이의 왜놈 순사보다도 더 악독했다는 게 어른들의 한결같은 이야기였다. "가히 경찰이 빨갱이를 만든 거라!" 그 때문에 선량한 양민들이 경찰의 각종 악행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빨치산에 입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지리산 기슭의 어른들은 증언한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의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구술 증언 한 ..

학살 유족 "지리산을 동해에 던지고 싶었다"

1949년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던 경남 함양군 민간인희생자 86명에 대한 명예회복이 60년만에 이뤄지게 됐다. 알다시피 함양은 1951년 2월 7일에도 유림면과 휴천면에서 인근 산청군 금서면 주민을 포함한 민간인 705명이 무참히 학살된 지역이다. 한반도의 남쪽 내륙지방인 함양에서 왜 이렇게 많은 민간인학살사건이 일어났을까? 함양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가장 오랜 전쟁을 치른 곳이었다.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1954년까지도 함양군은 전쟁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함양군민에게 한국전쟁은 가히 '7년 전쟁'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함양 사람들 중에는 '15년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마천애향회가 1994년 펴낸 는 "다른 지역에서는 한..

이스라엘군 민간인학살, 한국군 학살은?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의 한 마을 집에 민간인 110명을 몰아넣은 뒤 포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한 30여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지난 9일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됐다. 유엔은 보고서를 통해 "집안에 갇혀 있던 팔레스타인인의 절반가량은 어린이들이었다"면서 "가자지구 침공이 시작된 이후 가장 심각한 사건 중 하나"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하루 전날인 8일,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과 관련, 국군과 경찰이 반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439명을 불법적으로 집단학살했다며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순천지역 희생자는 439명으로 확인됐으나,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거나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2000여 명을 상회할 것으..

이들은 왜 열여덟 청상과부가 되었나

노점순·김서운은 동갑내기다. 노점순은 열 다섯, 김서운은 한 해 먼저 열 네 살 어린 나이에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로 시집을 갔다. 그녀들의 시댁은 아래 윗집 사이였다. 김서운은 병곡댁, 노점순은 도북댁이라는 택호로 불렸다. 철없는 소녀의 나이로 각 가정의 며느리와 아내가 된 그들은 같은 해인 1949년 열 여덟에 첫 아이를 낳았다. 노점순은 그해 4월, 김서운은 9월초에 각각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김서운의 남편 최재일(당시 26세)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루 전날인 9월 6일 오후 노점순의 남편 박판갑(당시 23세) 등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노점순의 남편은 집을 나서기 전 방에 누워있던 생후 4개월짜리 아들에게 입을 쪽 하고 맞추며 "아부지 갔다올께" 하고 말..

폐허로 방치된 한 혁명가 하준수의 생가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보다 더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하준수(1921~1955)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게바라(1928~1967)보다 더 일찍 태어나, 더 일찍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는 미 군정 시절 유격대의 작전명 남도부(南道富)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함양군의 천석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주중학교(현 진주고)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해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졸업반 시절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숨어든 그는 지리산에서 동지 70여 명을 규합, 보광당이라는 항일 무장게릴라 부대를 창설합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파르티잔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몽양 여운형과 함께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군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 군정..

70 노인이 말하는 빨갱이의 정의

며칠 전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를 발굴해온 경남대 이상길 교수를 인터뷰해 "뼈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나요?"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댓글에 또 '빨갱이' 운운하는 비방이 올라왔다. 그 포스트뿐 아니다. 과거 독재자를 비판하거나 은폐된 역사를 들춰내는 글을 쓰면 영락없이 '빨갱이'니 '좌빨'이니 하는 악플이 붙는다. 놀라운 것은 그런 댓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붉은 늑대로 표현했던 냉전 교육을 받지도 않은 젊은 세대가 아직도 그런 말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레드컴플렉스가 얼마나 뿌리깊은 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들이 정말 빨갱이가 뭔지나 알고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

산골 장터의 평화와 집단학살의 기억

지난 19일 지리산 아래에 있는 한 산골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라는 곳입니다. 퇴계 이황과 대척점에서 조선 유림의 거두였던 남명 조식 선생이 말년에 수학하다 돌아가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요즘은 산청 지리산 곶감으로 유명하며, 이곳의 식당에서 파는 돼지고기는 대부분 지리산 흑돼지로도 유명합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어서 산골의 장터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덕천강가의 정자에서 무더위를 피하고 계십니다. 건너편에서는 한 상인이 화분의 나무와 화초를 팔고 있었습니다. 빨간 벼슬의 장닭(수탉)도 팔러나온 거랍니다. 값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쌌는데, 5000원이라더군요. 만물상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상답게 낚시도구는 물론 각종 공산품과 곶감, 벌꿀, 고로쇠 등 식품에다 신..

빨치산 은거지 '비트' 보셨나요?

전남 화순군에 있는 백아산(810m)은 지리산, 백운산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3대 근거지였다고 합니다. 백아산 자연휴양림 입구에는 '백아산 6.25 전적지 안내'라는 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에 비교적 객관적으로 당시의 빨치산 활동을 소개해놨더군요.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까지도 남아 있던 빨치산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백아산에는 당시 빨치산의 비트(비밀아지트)였던 곳도 적지 않은데, 그 중 한 군데는 역사탐방객들을 위해 복원도 해놓았더군요.

가본 곳 200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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