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썸네일형 리스트형 49년전 피학살유족회 결의사항을 보니… 지난 한 주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두 번의 강의를 했고, 두 건의 사내 행사(블로그 강좌, 지면평가위 워크숍)를 제가 속한 부서 주관으로 치러냈으며, 금요일(16일)엔 1960년 이후 49년만에 부활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지역 합동위령제' 행사를 도왔습니다. 위령제 준비과정에서 제가 맡은 것은 행사 안내 팸플릿과 마산 민간인학살 자료집을 편집, 발간하는 일이었습니다. 팸플릿은 24페이지, 자료집은 145페이지 분량의 소책자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책(冊)을 만드는 일이라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마산유족회 발행, 김주완 편저, 비매품)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자료집은 '한국전쟁 전후 마산지역 민간인학살에 대한 유족과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더보기 오빠 영정 안고 나온 81세 할머니의 눈물 지난 16일(금) 오후 1시30분부터 4시까지 마산종합운동장 올림픽기념관에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2000여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습니다. 학살된지 59년만에 열린 위령제였습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첫 위령제가 열렸으나, 이듬해 5·16쿠데타로 인해 강제로 중단된 지 49년만에 열린 제2차 위령제입니다. 이날 위령제에는 당시 23살의 나이로 학살된 오빠가 학창시절에 찍은 영정 사진을 들고 나온 할머니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임홍련(81) 할머니는 "철도 회사에 다니던 오빠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채 끌려 나가 마산 앞바다에서 학살, 수장당했다"며 울먹였습니다. 오빠의 이름은 '임홍규'라고 했습니다. 임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가 세 .. 더보기 대통령은 '사과'했는데 장관은 '유감'인가 16일 오후 마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사과문도 발표되어 눈길을 끌었다. 위령제 자리에서 국가가 공식 사과하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권고사항'에 근거한 것이다.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 제1번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1) 국가의 공식 사과 본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부산·마산·진주형무소의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들이 계엄 하 국가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비록 계엄 하 전시상황이라 하더라도 형무소 재.. 더보기 국문학자가 밝혀낸 역사의 불편한 진실 내가 지금까지 기자노릇을 해오면서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일이 '민간인학살' 문제였다.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분개하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경악할 줄 아는 한국사람들이, 그리 멀지도 않은 시기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100만 민간인학살 만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 탓으로 봐야 할까, 내 치부를 보지 않으려는 비겁한 외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체험과 그 트라우마로 인한 의도적 망각일까. 신경득 교수의 돈 안되는 연구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학살자의 자식들이 '좌익으로 몰.. 더보기 학살 암매장 유골,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진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중·하순경 국민보도연맹원과 진주형무소 재소자 1200여 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 암매장된 지 59년만의 일이다. 김해 봉하마을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 49재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10일이었다.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 감나무밭 일대에서 유해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남대박물관 발굴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이 이날 오전 매장추정지를 약 10cm 정도 파들어가자 곧바로 앙상한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러난 3~4구의 유해 옆에서 M1 소총의 탄피도 발견됐다. ※관련 글 : 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이곳은 현재의 토지소유주가 지난 80년대 초 감나무 과수원 용도로 땅을 .. 더보기 김주완 '기자정신(?)' 많이 죽었다 내가 학살현장 유골 사진촬영을 포기한 까닭 나는 매주 월요일자 신문의 17면(기획면) 한판을 채워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그때그때의 이슈를 취재해 기획기사를 출고하거나 '김주완이 만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내고 있다. 지난 금요일(10일) 알고 지내는 '민간인학살 진주유족회'의 한 회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유해발굴 현장에서 유골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명석면 용산리에서 진행돼왔던 발굴은 사실상 실패했다. 그런데 문산읍 상문리에서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다음날인 11일 현장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주 월요일자 기획을 그걸로 잡기로 했다. 다음날 마침 진주 가는 후배의 차를 얻어타고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법륜골에 도착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 더보기 62살이 되어서야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정치군인들에 의해 강제해산됐던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가 어제(20일) 48년만에 재창립대회를 열었다. 어제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62) 유족회장은 1950년 당시 우리 나이로 세살바기 아기였다. 그 때 아버지 노상도 씨를 잃고 평생 '아비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던 그는 62세 노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살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글이었는데, 이제야 썼으니 신문에 실을 수 있으면 싣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려도 된다"는 문자메시지와 함께…. 당연히 신문에 게재하고, 이 블로그에도 올려 많은 분들과 그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아버지! 아버지를 얼마나 불러 보고 .. 더보기 아버지와 숙부의 한 풀겠다는 60대의 사연 60대 이상의 마산시민 중 '노현섭'이라는 이름을 모른다면 그는 마산토박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도 그를 모른다면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50~60년대 노동·인권운동가 노현섭 그로 말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마산의 바웬사' 같은 인물이었고, 일찌기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하고 전국적인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였다. 노현섭(1920~1992) 씨는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이후 마산상고를 거쳐 용마고등학교로 바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더보기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