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독재자 7

40년 전 국민학생 시절과 독재자 박정희

나는 박정희가 싫다. 5·16군사쿠데타, 10월유신, 계엄령·위수령, 비상사태·긴급조치, 중앙정보부, 공포통치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객관 사실 때문에도 그렇지만 개인 경험만으로도 나는 박정희가 너무 싫다. 나는 1963년 생이다. 1970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박정희는 이태 전인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박정희는 전체주의에 따라 사회 모든 분야를 군사화했다. 그것은 조그만 시골 국민학교 교실에까지 관철되고 있었다.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입학식 하는 첫 날, 배우지도 듣지도 못했기에 교문을 그냥 지나쳤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불러 세워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때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뒤 학교 생활에..

젊은이들의 비판의식이 꺾여버린 까닭

이번 학기, 제가 수업을 맡고 있던 대학생들에게 이런 과제를 내봤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투표와 집회·시위 등 사회 참여를 꺼리는 까닭에 대해 기획취재를 해보라는 거였습니다. 학생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관련 자료를 찾고, 카카오톡을 이용해 친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하고,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교수와 면담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했더군요. 그 결과 학생들의 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키워드를 정리해보니 '스펙 경쟁' '취업 경쟁' '개인화' '현실 순응' '부모 의존' '인터넷·모바일' 등이었고, '계층 변화'라는 단어도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과거 대학생이 사회변화의 주력이었던 시절과 지금의 대학생은 아예 '계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부 소수만 대학에..

가부장제와 독재가 당연한 줄 알았던 시절

월간 11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시어머니는 아들과 따로 밥상을 차리셨어요. 남편은 혼자 독상을 받았고 저와 시어머니는 부엌 한켠에서 밥을 먹었죠. 어린 시절 친정엄마와 함께 한 자리에서 밥 먹던 저에겐 충격이었죠. 태어나 27년 만에 가부장적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에요.” 이번호에서 박민국 기자가 인터뷰한 시민운동가 이경희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정에서 60~70년대를 지낸 사람들이라면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식사를 했을 겁니다. 저희 집도 그랬으니까요. 장남인 저는 아버지와 겸상을 받았고, 누나와 여동생들은 둥근 도레상에서 따로 밥을 먹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계란이나 생선 등 귀한 반찬은 아버지와 제가 받은 겸상에 놓였습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와 연결된 샛문을 오가며 ..

보람만 누리고 고통은 떠넘기는 홍준표

지금 경남도는 비상사태다. 홍준표 도지사가 새누리당 공천으로 당선되자마자 ‘부채 청산’ 또는 ‘부채 축소’를 명분으로 삼아 사실상 비상사태를 만들어냈다. 독재자 박정희가 1970년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국가 보위’ 또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삼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을 옥죈 데 견줄만하다. 경남문화재단·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경남영상위원회를 경남문화예술진흥재단으로 통·폐합하겠다는 방안을 통한 예산 절감 목표액은 5억8400만원이다. 갈수록 빚이 쌓이는 진주의료원 폐업은 부채를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더불어 경남도는, 지금껏 쌓인 부채 270억원도 진주의료원의 현재 보유 자산을 처분해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 싶다. 경남도는 나아가 18개 시·군의 지역 균형 발전이 목적인 모..

쌍계사에서 만난 독재자 앞잡이 김성곤

1. 죽을 때까지 호사를 누린 김성곤 성곡 김성곤(省谷 金成坤), 제 기억에서 까맣게 잊혀져 있던 이 이름이, 하동 쌍계사에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기억에 그이는 독재자 박정희 앞잡이이며 동시에 돈줄입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갖은 호사를 죽을 때까지 누렸습니다. 팔자도 참 좋습니다. 물론, 그이에 대한 악감정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그이의 이름이 쌍계사 들머리 돌다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있었을 텐데, 제가 무심해서 이번에야 봤던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습니다. “김성곤(1913~1975). 호는 성곡이며,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금성방직· 동양통신·연합신문 사장, 쌍용양회·쌍용산업 회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치가로 활동했다. 1..

10.26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

1. 1979년 10월 26일의 일상 1979년이면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그 해 10월 26일도 저는 별 일 없이 지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체육을 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집은 동아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다음날 저녁 신문에 ‘박 대통령 有故’라고, 주먹만하게 활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아시는 대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알에 맞아서 경호실장 차지철과 함께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안가(安家)에서 술을 마시다 처참하게 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권력이란 좋은 게 못 돼.’ 생각했고, 한 달 남짓 뒤에 미국 잡지 타임인가에 ‘General Chun Takes Power.’ 기사가 실렸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전 장군 권력을 잡다, 쯤이 되겠는데요, 아..

경주에서 발견한 박정희 송덕비

저도 대학 땐 적잖이 데모도 해봤지만, 한총련과 그 이전의 전대협이 내놓는 유인물이나 대자보에서 유난히 거부감을 느꼈던 게 있습니다. '000 의장님께서 연행되셨습니다'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존대어 때문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발표되는 성명서 같은 데서 '~님께서 ~되셨습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 국민이 대통령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게 상식이고, 전대협이나 한총련 의장 또한 그 조직을 구성하는 학생 대중의 대표 심부름꾼일 뿐 대중보다 높은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한총련이나 전대협이 그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스스로 북한 추종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위원장께서 교시하시었습니다' 따위의 표현을 쓰기 때문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