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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섭 15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뿌리깊은 피해의식

어제(20일) 오후 1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창립대회가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 정권에 의해 유족회 간부가 구속되고 강제해산되는 아픔을 겪은 후, 48년만에 재창립되는 행사였다. 창립 준비과정에 함께 했고, 어제 행사 사회를 내가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마산의 학살사건을 처음으로 발굴해서 보도하고, 1960년 유족회 활동과 강제해산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선 정말 각별한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유족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버지가 학살된지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유족들의 '빨갱이 컴플렉스'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genocide)과 달리 한국에서의 민간인학살은 명백한 '정치적 학살(massacre..

48년만에 다시 창립되는 학살 유족회

제가 돕고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주)'가 마침내 창립총회를 엽니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정권에 의해 강제해산된 지 48년 만에 다시 창립되는 것입니다. 저는 유족은 아니지만, 자문위원 자격으로 그동안 준비위원회를 도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는 저는 지역언론과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 그리고 몇몇 블로거 님들께 아래와 같은 보도자료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드렸습니다.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로 2000여 명에 이르는 억울한 영혼과 유족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유족들은 현 이명박 정권 들어 후퇴하고 있는 진실규명 작업에 분노하면서도, 아직도 깊은 공포와 오랜 피해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부디 많은 기자와 블록거 님들이 오셔서 이들의 슬픔과 한..

아버지와 숙부의 한 풀겠다는 60대의 사연

60대 이상의 마산시민 중 '노현섭'이라는 이름을 모른다면 그는 마산토박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서도 그를 모른다면 얼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50~60년대 노동·인권운동가 노현섭 그로 말하자면 노동운동에서 '마산의 바웬사' 같은 인물이었고, 일찌기 혁신정당 운동을 벌인 진보정치인이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 만행을 가장 먼저 폭로하고 전국적인 진상규명 운동을 이끈 인권운동가였다. 노현섭(1920~1992) 씨는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이후 마산상고를 거쳐 용마고등학교로 바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 할머니의 눈물

마산과 진주·부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은 오늘(2일) 오전이지만, 사실 저는 유족을 통해 미리 결정통지문을 입수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발표가 나온 날, 제가 아는 희생자 유족 가운데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 60년 가까이 핏줄 한 명 없이 평생 홀몸으로 살아온 황점순 할머니댁을 구자환 기자와 함께 찾았습니다. 뚜렷한 취재계획은 없이 그냥 할머니를 뵙고 싶었습니다. 황점순(83) 할머니는 제가 1999년 10월, 처음으로 마산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보도할 때 만난 후 지금까지 10년간 교류해..

48년 전 여름 마산은 울음바다였다

소복을 입은 아낙네들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 무슨 일일까? 1960년 마산 3.15의거와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사람들은 한국전쟁 당시 재판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사람들의 유족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상시적인 감시대상으로 찍혀 반강제적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 인민군이나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주민 전원이 몰살된 마을... 킬링필드를 능가할 정도로 이렇게 학살된 숫자가 전국적으로 최소 30만, 최대 100만 명에 이르렀다. 경남 마산에서만 해도 1681명이 바다에 수장되거나 산기슭에서 총살당했다. 무고하게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전쟁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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