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볼 결심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SNS에는 존경스러운 스승에 관한 글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런 스승이 없다는 글도 많았다. 고통의 기억을 남긴 선생님들에 관한 얘기도 적지 않았다. 나는 혼자만 그렇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1. 국민학교 때
1970년 3월 국민학교 입학한 다음 날부터 맞기 시작했다. 대답할 때 왼손을 들지 않았다고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필기를 하니까 당연히 “저요” 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는데 왼손이 아니라고 얻어터졌다.
한강철교도 있었다. 비오는 날이었는데 운동장으로 내몰렸다. 60명 남짓 여덟 살 아이들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어깨 위에 다른 친구의 발을 올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앞으로 십 보”, “우로 삼 보”, “좌로 이 보”, “뒤로 오 보” 등을 실행했다. 무너지면 얼굴은 모래에 긁혔고 몸통은 빗물과 뒹굴었다.
3학년 때는 코피로 얼굴이 범벅이 되도록 맞았다. 하도 맞아서 오줌을 지리는 바람에 마루바닥을 적신 적도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며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이소”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학년 2학기~6학년 1학기는 탁구부를 했다. 강제로 시킨 것이었다. 손바닥이 어찌나 컸던지 뺨을 맞을 때는 솥뚜껑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구방망이뿐 아니라 곡괭이 자루로도 ‘빳따’를 맞았다. 폭력은 둘도 없는 훈육의 수단이었고 하나뿐인 소통의 도구였다.
2.중고등학교 때
중학교 어떤 선생님은 촌지를 위하여 학부모를 소환했다. 부모님이 오시지 않는 학생은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때리는 재미가 각별한 선생님도 있었다. 조그만 북채를 들고 다니며 이마를 가격하는 취미였다. 특정 부위를 집중 타격하는 바람에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나자 당황해하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고등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갖은 명분과 이유를 대며 때렸다. 떠들었다고 때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품을 했다고 때리고 웃었다고 때리고 고개를 돌렸다고 때렸다. 차마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인 것도 이밖에 많았다. 100점 만점에서 빠지는 점수만큼 때리는 것도 괴로웠다. 스물다섯 문제를 냈는데 한 개 틀리면 96점 넉 대, 열 개 틀리면 60점 마흔 대였다.
3. 다섯 시간을 꿇어앉아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듣던 친구는 “너는 어째 따뜻한 선생님이 한 분도 없냐?”고 했다. 한참을 생각했어도 처음에는 떠오르는 선생님이 없었다. 매질이 덜한 선생님은 있어도 따뜻했던 선생님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막판에 한 분이 문득 어슴푸레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조회를 마치고 나가던 담임선생님이 무심한 듯 돌아서더니 “야, 김훤주. 교무실로 따라와” 했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1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입구를 가리키며 “꿇어앉아 있어”라고 했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수업하러 나갔다. 4교시까지 내내 그랬고 10분씩 쉬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교무실 입구는 고약한 자리였다. 선생님들은 지나가면서 커다란 국방색 출석부로 정수리를 내리쳤다. 일으켜 세우고 뺨을 때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왜 여기 있냐?”고 묻기도 했는데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대부분 “모르긴 뭘 몰라” 하며 때렸다. “그래?” 하면서 그냥 가는 선생님도 없지는 않았다.
4. 몽둥이 네 개가 부러졌다
나는 꿇어앉아 있어야 하는 까닭을 몰랐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반가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얘기라도 해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담임선생님은 눈길도 주지 않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돌아와서도 다른 선생님들과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었다.
5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그제야 “일어나 따라와”라고 했다. 나는 기듯이 일어나 절면서 따라갔다. 담임선생님은 청소도구 따위를 두는 골방으로 들어갔다. 창틀을 가리키며 ‘엎드려뻗쳐’를 시키고는 밀걸레에서 자루를 뽑아내 내리치기 시작했다.
매질은 네 번째 자루가 부러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야 이 새끼야, 어제 왜 결석했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감기로 아파서 결석했고, 주머니에는 띠동갑 큰형이 써준 결석계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훑어보더니 “야 이 새끼야, 이걸 와 인자 내노”라고 말했다.
5. 따뜻했던 손바닥
나는 운동장 스텐드 옆 세면대에 가서 수도꼭지를 있는대로 틀고 머리를 처박았다. 하늘은 맑았고 운동장은 적막했다. 쏟아지는 수돗물로는 울음소리를 감추기 어려웠다. 꺽꺽거리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에서 손바닥만 한 온기가 느껴졌다. 방금 전 교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던 선생님이었다.
국어를 가르치는 줄은 알았지만 수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도 달래는 눈빛도 아니었다. 무심한 얼굴로 말 없이 어깨를 토닥거렸다. 울음이 잦아들고 흐느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선생님은 조금 더 토닥이다가 교무실로 들어갔다. 거의 비슷하게 5교시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6. 드물게 고마운 위로였지만
나에게 그 선생님은 드물게 고마운 위로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손길도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다. 우리를 에워싼 선생님들의 폭력은 그보다 훨씬 더 높고 견고했다. 그래도 그런 손길마저 없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나는 그 선생님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한다. 토닥여준 그 손길조차 그동안 기억 너머에 두고 있다가 이제야 떠올렸다. 반면 담임선생님은 성함은 물론 별명까지 기억 난다. 그런 기억은 대체로 고통을 동반한다. 이제는 잊어보아야겠다.
---------------------
박정희 유신 교육이 이런 폭력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국가 폭력이 학교 폭력과 교사 폭력의 뿌리였다. 개인의 사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의 증거물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남겨본다.
김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