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 어두운 시세계 vs 밝고 환했던 일상
성우제가 쓴 책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를 보면 기형도 시인 관련 글이 세 꼭지 실려 있다. 세 살 많은 형 성석제(소설가)의 대학 친구가 기형도였고 그 때문에 성우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형도와 잘 알고 지내게 되었다.
성우제의 글을 다른 이들의 기형도 관련 글과 비교하면 색깔이나 무늬가 다르다. 기형도가 등단하고 알게 된 사이도 아니고 대학 시절 무엇을 함께 도모하거나 행동한 관계도 아니다. 친구의 동생으로서 보고 들은 기형도의 일상을 꾸밈없이 적었다.
여기에서 기형도는 밝고 환하고 명랑하고 경쾌한 모습이다. 어둡거나 침울하고 무거운 구석은 없다. 예의도 바르고 노래도 잘하고 말재주도 좋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할 줄도 알았다. 그 중 몇몇 대목을 고르면 아래와 같다.
“기형도는 친구들 중에서 어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형도는 김치를 묵어도, 우예 그리 맛나게 묵노? 우리 집에서 묵으면 밥이 맛나다는 소리를 밥 한 번 묵으면서 백 번도 더 한 대이.’”
“기형도는 동생들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는 늘 말없고 무뚝뚝한 내 형보다는, 늘 말 많고 살가운 기형도한테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다.”
“부모님이 일요일 새벽 6시 미사를 가시면 함께 따라나서기도 했다. 기형도는 성가를 큰 소리로 얼마나 잘 부르는지 다른 친구들도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기형도는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아주 잘했다.”
나는 이런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기형도의 작품 가운데 나도 한 번은 읽었을 정도로 유명한 시들은 다들 어둠, 아픔, 슬픔을 깔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니.
이를테면 등단작 ‘안개’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빈집’이나 ‘엄마 생각’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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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의 내 유년의 윗목
시집에 답이 있겠지 싶어 들추어 보았다.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거기에는 아프고 슬픈 본인의 삶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구멍이 숭숭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수당까지 받았어.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 봄이 가고. / 우리는, 새벽마다 새들이 쭈그려 앉아 /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누이여 /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아버지가 쓰러지자 가세가 기울었다. 학교를 그만둔 큰누나는 공장에 나갔고 결혼하며 뿌린 꽃씨는 자라기 전에 몸통이 잘렸다. 학교 다니며 신문 배달을 했던 작은누나는 잎도 피우기 전에 생애가 꺾였다. 나는 상장을 접어 만든 종이배를 개천에 고이 떠내려 보냈다.
이런 환경이었으니 이별·불안·탄식·절망이 기형도를 지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 길 위에서 인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기형도의 일상과 시세계가 서로 다른 것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같았다면 불안이나 절망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꾸며서라도 쾌활하고 환한 일상을 이어가야지 그나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지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래 시에서 보자면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기’와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떠나기’ 두 가지였다. 그것은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꼭 갖추어야 하는 미덕이었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 다음 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시집을 읽고 나서 성우제의 글을 다시 읽었다. 밝은 일상에 스며 있는 촉촉한 물기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밝음과 어둠…… 등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가 이렇게 느낌이 달랐다.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그런데 기형도는 이렇게 살아가다가 서른 살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그의 허망한 죽음은 유전으로 말미암은 측면이 컸다고 알려져 있고 그에 따른 증세도 자주 겼었다고 한다. 그의 아프고 슬픈 삶은 죽음의 공포와도 늘 동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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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성우제의 기형도 관련 글에는 기형도 시인의 미발표 육필시 세 편과 손글씨로 적어 내린 시인론도 한 편 들어 있다.
김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