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⑤백성이 권력 이긴 첫경험
4월혁명을 낳은 3·15의거
지금부터는 마산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3·15의거를 알아보도록 해요. 어른들은 3·15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해요.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말로만 들었지 아득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자세히 한 번 살펴보자구요.(친구들 집중 집중!!)
3·15의거는 1960년에 일어났어요. 그때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58살이니 어느새 60년 전의 역사가 되었군요. 친구들은 3·15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지요? 김주열~~(우와 완전 짱~~!!) 이승만요!! 하고 답하는 친구들이 참 많더라구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1948년 대통령이 되고 난 후 2대 3대까지 대통령을 했어요. 이제 그만~~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으니 말이에요. 1960년 3월 15일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날이었어요.
이승만 정부는 당선을 위하여 부정을 저질렀어요. 어느 정도였나 하면요~!! 선거날이 되기도 전에 이미 투표지의 40%를 투표함에 집어넣어 놓았어요.
또 당일에는 3~5명씩 묶어서 공개투표를 시켰어요. 공개투표가 뭐냐구요? 비밀투표의 반대요. 여러분들 반장 선거할 때 공개로 투표하면 소신껏 할 수 있나요? 이 친구 저 친구 눈치 보이잖아요.
뿐만 아니었어요. 이승만 쪽을 찍은 엉터리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기도 했어요. 정치깡패와 공무원·경찰을 동원하여 야당 쪽 참관인까지 쫓아내버렸어요. 이거 뭐 악질 조폭 수준이지요.
3.15의거 발원지를 알리는 동판.
그래서 국민들이 ‘더 이상 이런 더러운 꼴을 볼 수 없다’ 하고 들고 일어난 거지요.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누구냐? 바로 마산 사람들이었다, 이겁니다.(대단하지요~!!) 3월 15일 당일 정오 12시 마산 오동동 거리에 모여 ‘부정 선거는 무효다!’라고 외쳤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다고 내가 잘못했소 물러나겠소 했을까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지요.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대에게 총을 쏘아댔어요. 이 사건으로 채 피지도 못한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7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80명 가까이 총알에 맞아 다쳤어요.
그렇게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시신 하나가 떠올랐어요. 바로 그 김주열이었어요. 김주열은 당시 마산상고 입학을 앞둔 열일곱 살 학생이었어요.
물 위로 떠오른 시신이 너무 처참했어요. 눈알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거든요. 거기에다 경찰이 살해 사실을 숨기려고 무거운 물건을 매달아 바다에 버렸다는 사실까지 탄로가 나 버린 거죠.
이를 본 마산 시민들은 부정선거와 살인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13일까지 사흘 동안 격렬하게 벌였어요. 이 사건이 어떻게 4·19혁명으로 이어지는지 궁금하죠? 결정적인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어요.
최루탄을 맞고 죽은 처참한 김주열의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돼요.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훨씬 더 생생하잖아요. 그러고 보면 사진 한 장의 위력이 정말 대단한 거죠.
4월 19일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은 또다시 국민을 향해 총질을 해댔어요. 하루만에 130명 남짓이 죽고 1000명 넘게 부상할 정도였어요.
20일부터는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대거 시위에 참여를 하게 돼요. 25일에는 대학교수들까지 나서지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말이에요. 결국 이승만은 이튿날 라디오 방송으로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달아나게 되지요.
3·15로 시작해서 4·19로 이어지는 4월혁명은 두 가지 큰 의의가 있어요. 하나는 고조선에서 신라·백제·고구려·가야를 거쳐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국민이 권력을 이긴 최초의 사건이라는 점이구요.
또 하나는 중심이 10대였다는 거지요. 물론 나중에는 어른들도 동참을 하지만요.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도 데모에 나섰답니다. “우리의 부모형제들에게 총을 겨누지 마라”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지요.
우리 친구들도 10대지요. 우리가 정치를 뭘 알아~ 정치는 우리와 상관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들!! 3·15의거의 중심에 10대들이 있었다는 것 꼭 기억하세요.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을 딛고 이룩한 이 4월혁명에서 마산을 왜 높이 쳐주는지 알겠나요? 선생님이 친구들한테 부당하게 하는 거예요.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생각만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선생님, 그것은 잘못된 일이잖아요!” 이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 손을 들고 “선생님, 선생님의 그런 점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했을 때 마음이 어때요? 와~ 싶은 거지요. 한 친구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에 여기저기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해요. 처음이 그래서 참 어렵고 그래서 의미 있고 그래요.
바닥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 동판을 살펴보고 있는 학생들.
마산이 가장 먼저 이승만을 상대로 “당신이 잘못한 거야.”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용기 있다고 인정해주는 거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나고 자란 마산에 대해 마음껏 자부심을 가져도 좋답니다.
마산에는 그래서 3·15의거 관련 기념물들이 곳곳에 있어요.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치거나 모르거나 그렇지만요. 추산동 대로변에 기념탑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근처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는 당시 경찰이 쏘았던 총탄들이 열아홉 군데 자국으로 남아 있지요.
최초 시위를 벌였던 오동동 길바닥에는 발원지를 알리는 기념동판이 놓여 있습니다. 가장 시위가 격렬했던 당시 북마산파출소 근처 성남교 주변에는 3·15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요.
또 김주열이 입학할 예정이던 용마고(당시 마산상고)에는 김주열 흉상과 추모비, 신포동 대한통운 사옥 근처 마산중앙부두 해변에는 김주열 시신 인양지 표지, 마산중앙중학교·마산공업고등학교·마산고등학교 등에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숨진 해당 학교 학생을 기리는 빗돌~
마산에는 이렇게 3·15를 기억하는 흔적들이 많아요. 구암동에 가면 국립 3·15민주묘지도 있어요. 당시 의거에 참여하여 죽거나 다친 이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는 성지랍니다. 친구들도 여기 가거들랑 의롭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시길~~^^::
스토리는 힘이 세다
이제 마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앞에서 이런저런 마산의 역사를 더듬어봤어요. 그런데 왠지 좀 허전하지요? 왜 그럴까요? 역사는 가득한데 남아있는 것들이 너무 없기 때문일 거예요.
경주나 진주 전주 이런 곳에 여행을 다니다보면 참 부러울 때가 있어요. 잘 보존된 문화유산이 커다란 지역 자산이 된 고장이지요. 거기에 비하면 마산은 참 그렇죠?
3.15의거 발원지 옆에 있는 위안부소녀상. 자주평화인권다짐비라 하지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제강점기의 근대문화유산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거든요. 신마산에 지었다는 그 많던 적산가옥들이며 흔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들이 제대로 남아있다면 정말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좋은 문화유산이 되었을테 (아~아쉽고~아깝다~~!!)
그렇지만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있었던 역사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남아 있지 않은 흔적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는 우리의 몫인 것 같아요. 그 방법의 하나가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싶어요. 스토리텔링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 빨리 검색기 가동하세요. 뭐라고 나오나요? ‘이미지나 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것’ 이런 뜻이지요.
좀 쉽게 설명을 해볼게요. 3·15의거기념탑 옆에 우물이 하나 있어요. 눈으로 보면 그냥 우물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준비하면서 군사들이 마셨던 우물인 거지요. 이건 분명한 팩트지요.
그런데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요. 그냥 말라붙은 우물 하나뿐입니다. 여기에다 고려와 몽골의 군사들이 우물에서 샘물을 마시며 나누었던 대화며, 떠올렸을 고향이며, 슬픔이나 괴로움 이런 것들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면 몽고정 우물은 갑자기 특별해져요.
마산은 조선시대 이종무장군이 벌였던 대마도 정벌의 본부였어요.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로 들어가 싸워 이기고 돌아왔지요. 일본 정벌이 목표였던 여몽연합군과 진로와 거의 같은 경로이지요.
이 속에는 또 얼마나 드라마틱한 사연들이 숨어 있을지, 이런 것들을 더듬어 이야기를 만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요?
덧붙임 : 의림사, 마산이기에 대접받는 천년고찰
역사 흔적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마산에 의림사가 있다는 건 그나마 참 다행한 일이에요. 만약 의림사가 경주나 전주에 있었다면 눈길조차 받지 못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마산에서 보자면 고마운 절이랍니다.
의림사는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신라시대에 지어진 절이랍니다. 원래 이름은 ‘봉국사’였다는데, 임진왜란 때 의림사로 바뀌었어요. 이름이 바뀐 사연도 참 그럴듯해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이곳에 머물자 이웃 여러 고을에서 의(義)병이 숲(林)처럼 모여들었다 해서 의림사라 지었다네요!!
의림사 염불당 앞 삼층석탑과 파초.
의림사 입구에 들어서면 대부분 사람들은 감탄을 한답니다. 얼마나 멋있길래?? 궁금하지요. 여기서 잠시 엉뚱한 이야기 하나요~!! 부자가 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돈을 많이 버는 것, 또 하나는 욕심을 버리는 것. 이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눈치를 챘다면 거의 천재^^
의림사는 사람들이 별 기대 없이 찾는 절이에요. 기대가 없다보니 훨씬 더 좋게 보이는 거지요. 염불당 앞마당에는 삼층석탑과 파초가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요.
절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제각각 의미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렇다면 파초는 왜 염불당 앞마당에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친구들(짝짝짝^^) 파초는 줄기가 양파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데 하나하나 벗기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의미해요. 무아가 뭐냐구요? 크~꼼꼼하기는~^^:: ‘나조차 없다’는 뜻으로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말자, 뭐 그런 정도 불교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절간 마당에 파초를 심기도 한답니다.
마당에 심은 식물 하나에도 그런 뜻이 담겨 있다는 게 재미있지요. 산령각 앞에 있는 300살 먹은 모과나무도 아주 그럴 듯해요. 그러면 모과나무는 무슨 뜻이 담겨 있어요? 그렇게 질문을 하는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음~ 아마도 이 절 당시 주지 스님이 모과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요? 하하
김훤주
※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 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 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