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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지리산 덕유산을 동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함양 사람들

며칠 전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경남의 산-함양' 편을 읽으며 문득 오래 전에 썼던 보고서가 생각났다. 함양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전수조사를 했던 결과보고서였는데, 거기에 함양군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함양사람들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원자력의 힘으로 떠서 동해에 던져버리고 싶었다"는 구절이 나온다.그 산 때문에 유난히 파르티잔의 활동이 많았고, 그들을 토벌하던 군경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도 '경남의 산'에서 좀 언급되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부분을 다시 여기에 옮겨놓는다. 함양의 행정구역변천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함양지역은 함양군과 안의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으로 안의현이 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지방..

동네 촛불집회를 낱낱이 기록해야 하는 까닭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피플파워(People Power·민중의 힘)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민중항쟁의 결과가 어떻게 기록될 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 만으로도 또 한 번 대한민국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었습니다.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지역신문과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민주항쟁 20주년이 되던 지난 2008년, 80년대 경남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26회에 걸쳐 에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절실히 느꼈던 것이 ‘지역신문은 당대의 역사기록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그러나 80년대 경남지역 신문에선 별 도움이 되는 자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권의 충실한 애완견이었던 그 신문 지면을 통해 당시 기득권층과 기회주의자, ..

기자 노릇도 재미가 있어야 하지요

2016년 지역사 알림이 청소년 기자단----곁에 있어도 몰랐던 '우리 고장 역사' 경남도민일보는 경남지역 중·고교 학생들과 더불어 2013년부터 '청소년기자단'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주제는 '지역 역사 알림이'다. 지금 대부분 학생들은 자기 지역의 역사나 문화는 물론 여러 현안·쟁점을 잘 알지 못한다. 학생들이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자기가 딛고 선 발밑을 소홀히 하게 하는 원인이다. 극단적 중앙 집중과 세계적·전국적인 것만 가르치는 교육 현실 때문이겠다. 경남도민일보 청소년기자단의 역사는 지역 밀착의 역사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지원해주고 있다. 진주·마산 초등학생들과 함께한 2013년은 도랑 살리기가 주제였다. 도랑살리기운동이 지금은 전국 곳곳에 퍼져 있지만 원..

곡안리 민간인학살 어떤 사건이었느냐면...

#학살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곡안리 [정의] 1950년 8월 11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 씨 재실(齋室)에 피란해있던 이 마을 주민 150여 명이 미군의 공격을 받아 86명이 희생된 사건. [역사적 배경] 곡안리는 진주시와 마산시 진동면을 잇는 2번 국도 상에 자리잡은 성주 이씨 집성촌으로 전쟁 당시 17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큰 마을이었다. 또한 지금은 2번 국도가 쇠락했으나 당시는 진주-마산간 가장 주요한 도로 중 하나였다. 진주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함락된 7월 31일 이전까지 이곳은 전투도 없었고, 미군이나 국군 혹은 경찰로부터 소개 조치도 없었다. 따라서 주민 대부분은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8월 들어 마을 주변에 폭격이 시작되자 불안해진 주민들은 마을에서 뒤..

황점순 할머니가 결국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문득 황점순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했다.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마산 진전면 곡안리로 향했다. 출발할 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아 좀 불안했다. 그래도 여느때처럼 노인정에 있으려니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집은 비어 있었고 노인정에도 없었다. 알고 보니 몇 달 전 요양원(진동애양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다시 택시를 타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처음엔 못알아보던 할머니가 "김 기자입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마치 아들처럼 반겨주신다. 약소하나마 용돈을 드리니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말씀 도중 기억이 약간 오락가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헤어질 땐 1층까지 따라와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황점순 할머니는 1950년 자신의 나이 스물네 살 때 남편을 보도연맹원 학살로 잃고, 미군의 곡안..

수십년 원망했던 아버지, 이제야 진실을 알았습니다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딸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그리운 아버지께.죽음이 무언지도 모르던 다섯 살 아버지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어린 나를 볼 때마다 우시던 삼촌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철이 없던 사춘기 소녀가 되어선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어머니는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억울하다 하셨지만 그때마다 저는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하신 말은 저에게 모두 변명이었지요.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아버지는 해군통신학교 교장으로 제자 몇 몇이 여순사건에 가담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저는 핑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가 자기 국민을 죽일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만한 죄를 지었을 거라고.잡혀가신 뒤 김구 선생으로부터 3개월 생활비를 받..

홍준표 이창희 박대출 김재경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입장

지난 2일(토) 오후 1시 진주에서 '한국전쟁 전후 진주 민간인 피학살자 66주기 제8회 합동위령제'가 열렸다.전국에서 각 지역 유족회장들이 참석했고, 시민사회단체와 진주지역 문화단체, 진주시의회 시의원 등 많은 사람이 참석해 함께 해원(解寃)을 기원했다.하지만,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창희 진주시장, 김재경 국회의원, 박대출 국회의원은 참석하지 않는 대신 '추모사'를 보내 자료집에 실었다.선출직 정치인으로서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그들이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고 있는지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그래서 여기 기록해둔다.○ 홍준표 경남도지사 : 한국전쟁은 현대사에 가장 큰 비극이며, 특히 민간인 희생사건은 더 할 수 없는 상처를 우리 가슴에 남겼습니다. 진주지역에..

[문경 학살]살려줄테니 일어서라 해놓고 다시 사살

지난 2006년 12월 23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문경민간인학살 피해자 증언이 있었다. 앞의 글에서 이어지는 채홍연 씨의 증언이다. ☞앞의 글 : [문경 학살]창자 쏟아진 형이 살려달라 했지만...문경 민간인학살 생존자 채홍연씨의 피맺힌 증언1949년 12월 24일 아무런 죄도 없는 우리 석달마을 사람들이 국군들에 집단학살을 당한 그 때 저는 11세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족은 69세의 아버지와 77세의 종조모와 25세의 오빠와 저 넷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그 날 점심 때 쯤 되었을 때 갑자기 많은 군인들이 우리 마을에 들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우리 마을에 들이 닥친 군인들은 마을 앞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서 떠들면서 머물러 있더니 갑자기 호각을 불면서 큰 소리..

[문경 학살]창자 쏟아진 형이 "살려달라" 했지만...

평생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바쳐 온 문경유족회 채의진 회장이 28일 돌아가셨다.+오마이뉴스 보도 : 민간인 학살 생존자 '빨간베레모 할아버지' 별세1949년 전쟁 때도 아닌 평시에 주민들이 국군을 환영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산골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주민 86명을 무참히 살해한 경북 문경 산북면 석달동 민간인학살사건.더욱이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은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이었다.당시 살육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생존자와 유족들이 지난 2006년 12월 24일 오전 11시 한자리에 모여 제57주기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을 열었다.당시 추모식에는 유족회 채의진 회장과 생존자·유족들을 비롯, 신국환 국회의원(국민중심당)과 윤정길 문경시 부시장, 탁대학 문경시의회 의장과 문경출신 도의원 등이 참석했으..

87년 6월 10일 경남엔 무슨 일이 있었나(2)

경찰·행정·정당, 그리고 언론에 분노 폭발 6·10마산대회의 절정은 마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국제축구대회가 최루탄으로 인해 중단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마산대회는 국내·외 관심의 초점이 됐다. 오후 6시30분 마산 창동 코아제과 앞 도로를 거쳐 육호광장으로 진출하던 시위대는 가로막고 있던 경찰을 투석으로 돌파하고 일시에 광장을 점거했다. 박영주씨의 기록에 따르면 이 광장에서 시위대는 어디로 갈 것인지 잠시 논란을 벌였던 것으로 돼 있다. 만일 시위대가 운동장 쪽으로 가지 않고 마산역 방향으로 갔더라면 이날 시위는 싱겁게 마무리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운동장 쪽을 택했다. 87년 6월항쟁의 역사 중 17일 경상대생의 남해고속도로 LP 가스차 탈취사건과 함께 전국의 시위 열기에 가장 큰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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