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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황점순 이귀순 두 할머니 이야기

황점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찾아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진동 애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김 기잡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 김 기자가~" 하며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27년생인 할머니는 올해로 만 93세가 되셨다. 열아홉에 진동면 곡안리로 시집와 스물둘에 아들 이상섭을 낳았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과 함께 남편 이용순과 아들을 한국군과 미군의 학살로 잃었다. 그때 남편은 스물네 살, 아들은 고작 두 살이었다. 남편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학살 현장에서 잃었다. 시조부, ..

일본군 '위안부'와 민간인학살은 다른 사건이 아니다

“4283년(1950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1960년 7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가 국가를 상대로 낸 고발장) “김영명(23) 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조사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공공연한 성폭행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부’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

'디지털 박물관'도 없는 경남의 12개 시·군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다 '디지털 향토문화 전자대전'이라는 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창원시의 경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주시의 경우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되고 있지요. 예를 들어 '민주성지 마산'이라는 문구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네이버는 '지식백과', 다음은 '백과사전' 항목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민주 성지가 된 마산'이라는 글이 뜹니다. 그걸 클릭하면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의 해당 글이 열리죠. '마산 민간인학살'이라는 검색어를 넣어봅니다. 그러면 역시 백과사전 항목에 '마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과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글이 상위에 뜹니다. 이 또한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올려져 있는 콘텐츠입니다. 현대사의 두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디지털문화..

명문 이회영 일가는 재산 600억 원을 어떻게 썼나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을 아시나요? 그가 만주에 설립한 무장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는요? 아시는 분이 많겠지요. 아마 이름 정도는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딱 그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해, 그리고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남들보다 잘 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저희가 펴낸 (선안나 지음)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물론 저는 2016년 이 책을 출간할 때 책임편집자여서 원고 단계에서 내용을 읽었는데요. 최근 일본의 경제 도발을 계기로 ‘노(NO) 일본, 노 아베’ 운동이 확산하면서 부쩍 이 책 판매지수가 높아지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급히 5쇄를 출간하면서 책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저는 이회영 선생 집안이 이조판서와 대제학, 우의정을 지낸 백사 이..

일본 불매운동, 꼭 성공해야 할 이유

"단언하자면, 일본 국민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다." 일본 심리학자 기시다 슈는 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일본인의 자아가 둘로 분열되어 있다는 말이다. 미국에 비굴하게 복종하는 모습은 그들의 외적 자아이며, 대미 선전포고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은 억압되어 있던 내적 자아의 발현, 즉 '발광'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열은 일본 역사에서 10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번의 굴욕적 사건이 배경이다. 1853년 페리(흑선) 내항 사건과 1945년 미국의 원폭 투하에 의한 무조건 항복을 말한다. 패전 직후 일본 국민에게는 정신분열 환자들이 가지는 특유의 '태도 역전'이 일어나는데, 세계 역사상 일본에 진주한 미군만큼 피점령 국민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이 무난하게 진행된 예는 없다고 한다. 즉 어제까지만 해도 ..

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⑤백성이 권력 이긴 첫경험

4월혁명을 낳은 3·15의거 지금부터는 마산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3·15의거를 알아보도록 해요. 어른들은 3·15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해요.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말로만 들었지 아득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자세히 한 번 살펴보자구요.(친구들 집중 집중!!) 3·15의거는 1960년에 일어났어요. 그때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58살이니 어느새 60년 전의 역사가 되었군요. 친구들은 3·15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지요? 김주열~~(우와 완전 짱~~!!) 이승만요!! 하고 답하는 친구들이 참 많더라구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아주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1948년 대통령이 되고 난 후 2대 3대까지 대통령을 했어요. 이제 그만~~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의 욕심이란..

민간인학살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몇 가지

좀 민감한 이야기이긴 하다. 최근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가 제주4.3 관련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 4.3만이 오롯이 독립되어 홀로코스트의 유일무이성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면, 죽음 간의 위계를 만들어 다른 죽음을 경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말이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올해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목표로 삼고 있는 '4.3의 전국화와 세계화'는 역설적이게도 '4.3만 내세워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부연했다. "여순 사건과 예비검속 사건, 형무소 재소자 사건, 보도연맹 사건, 부역혐의자 사건, 군경토벌 관련 사건, 미군 사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모든 보복성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들을 모두 연결해 하나의 제노사이드로 ..

3.15마산의거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지난 1962년 건립된 마산시 합포구 신포동 3·15회관(지금은 철거되고 없음)의 전면에는 모두 12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이 하필 12개인 것은 1860년 3·15마산의거 당시 경찰이 쏜 총탄에 학살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2열사가 아니라 사실은 14열사 이들 12열사는 김영호(당시 19세·마산공고)·김효덕(19·직공)·김용실(18·마산고)·김영준(20·무직)·전의규(18·무직)·김삼웅(19·무직)·김영길(17·직공)·오성원(20·구두닦이)·김주열(17·마산상고)·강융기(19·마산공고)·김평도(38·점원)·김종술(16·마산동중) 등을 가리킨다. 이들 중 김영길 열사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날 밤 경찰과 대치하던..

죽기살기로 싸우는 의형제 중국인 이야기 4

를 읽었다. 앞서 읽었던 과 마찬가지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정리는 아니고, 그냥 가볍게 한 번 끼적거려 보았다. 1918년, 동북3성을 장악한 장쭤린은 정규군 양성을 서둘렀다. 사병들은 긁어모으기 쉬웠지만 장교가 부족했다. 신해혁명으로 폐교된 ‘동3성 강무당((講武堂)’ 자리에 ‘동북강무당’ 간판을 내걸고 생도들을 모집했다. 16쪽동북강무당은 동북군의 요람으로 윈난(雲南)강무당, 바오딩(保定)군관학교, 황푸(黃埔)군관학교와 함께 중국 4대 군관학교 중 하나였다. 개교도 쑨원이 광저우(廣州)에 설립한 황푸군관학교보다 6년 빨랐다. 훗날 신중국의 장군을 13명 배출했다. 19쪽장작림(張作霖)을 얄궂은 군벌 가운데 하나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밝은 눈과 추진력을 갖추고 시대정신까지 읽을 ..

신문사 편집국을 짓눌렀던 공포의 근원은?

우연히 컴퓨터 폴더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문서정보를 보니 2012년 12월 7일 작성된 글이다. 제목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을 보는 후배기자의 생각'이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그때 진주에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관련한 토론회가 있었고, 거기에 내가 토론자로 참석했었다. 기록삼아 뒤늦게나마 블로그에 올려둔다.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을 보는 후배기자의 생각1990년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된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나 경찰의 보안수사대(대공분실)에서 발표하는 시국사건 수사 결과는 취재가 필요없더라는 것이다. 즉 기자의 사실 확인 취재는 물론 일체의 보충 취재도 없이 그대로 신문에 발표 전문을 실었다. 따라서 기자가 기사를 쓸 필요도 없었다. 사진도 기관에서 제공해온 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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