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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6월항쟁 옛 진주시청 앞 시위 사진은 이영환 씨 작품

[이제야 말한다] 사실 이 사진은 전 경남신문 사진부장 이영환(2015년 작고) 님의 작품이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에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경남신문에 싣지 못했던 사진이기도 하다. 2007년, 내가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경남도민일보에 '87년 경남 항쟁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장기 기획연재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80년부터 87년까지 경남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촘촘히 재생하는 나름 쉽지 않은 취재였다. 그 과정에 이 사진의 원본 필름이 누군가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누군지, 사진 출처를 밝히지 말라'는 조건과 함께였다. 나름 이해는 됐다. 경쟁업체의 기자가 그 경쟁업체의 신문사 기자에게 자신의 사진을 제공하는 건 '해사행위'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항쟁 당시 진주..

잊어볼 결심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SNS에는 존경스러운 스승에 관한 글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런 스승이 없다는 글도 많았다. 고통의 기억을 남긴 선생님들에 관한 얘기도 적지 않았다. 나는 혼자만 그렇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1. 국민학교 때 1970년 3월 국민학교 입학한 다음 날부터 맞기 시작했다. 대답할 때 왼손을 들지 않았다고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필기를 하니까 당연히 “저요” 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는데 왼손이 아니라고 얻어터졌다. 한강철교도 있었다. 비오는 날이었는데 운동장으로 내몰렸다. 60명 남짓 여덟 살 아이들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어깨 위에 다른 친구의 발을 올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앞으로 십 보”, “우..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줬으면 그만이지> 고상욱과 김장하

정지아가 쓴 를 읽었다. 아주 '재미'가 있는 소설은 아니다. 소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따위의 흥미진진한 단계도 없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그들에 얽힌 이야기를 50대 후반 딸의 시선으로 담담히 풀어낸다. 딸이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알게 된 그의 면모, 몰랐던 사람인데 새롭게 알게된 아버지와 그의 관계, 그들에 얽힌 어릴 적의 기억과 세월이 흐른 뒤에 보이는 또다른 모습 등이 죽은 아버지의 일생으로 하나하나 완성되어 간다. 평생 사회주의자였지만 노동엔 서툴렀고, 천생 유물론자였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을 인정했으며, 혁명가이면서도 수컷의 욕망에 어쩔 줄 몰라 했던, 늘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모든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려했던 아버지의 삶이 장례식장에서..

민간인학살을 다룬 하아무 소설 '꽃분이'

소설가 하아무와 함께 2008년 함양에서 민간인학살 피해 전수조사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가 나왔다. 하아무 소설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의 혼란상,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빨치산 토벌과정의 학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중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다. 소설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이 겪은 고통에 초점을 맞췄다. 같은 작업을 했지만 나는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그 아픔을 디테일하게, 그러면서도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 덤덤한 문체가 오히려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후벼 판다. 만해문학상에 빛나는 조갑상의 에 이어 민간인학살을 다룬 또 하나의 명작 소설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하아무의 .

검찰의 돌변한 태도, 민간인학살 유족들이 참 걱정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여러 분야에서 비상식적인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태도다. 얼마 전 한 유족을 만났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발발 후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끌려간 후 학살되었는데, 이후 알고 보니 군법회의에 회부돼 국방경비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학살됐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불법 학살이라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고, 대한민국 사법부 역시 재심을 통해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무죄로 판결한 바 있다. 그게 불과 2년 전인 2020년의 일이다. 당시 대법원은 형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검찰은 이들 희생자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 역시 당연히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사건에 대..

민간인학살 희생자 창원 위령탑 건립취지문에 대한 설명

민간인학살 희생자 창원위령탑이 2022년 11월 26일 제막됐다. 참 오래 걸렸다. 72년만에 희생자 이름이 비석에 새겨졌다. 건립취지문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기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매년 합동추모제를 지내면서 학살 희생자의 성함이, 천에 인쇄된 글자로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면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최근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에서, 위패와 영정도 없이 ‘사고 사망자’라는 글자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이처럼 그 죽음의 책임자는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걸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유족들이 한데 모이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학살이 일어난지 무려 72년 만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비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 나이에 경찰 총알에 숨진 3.15의거 조현대 열사가 알려진 계기는?

어제(3월 15일) 경남신문에 3.15의거 61주년 기획으로 '조현대 열사를 찾아서'라는 기사가 나왔다. 읽던 중 쓴웃음이 나왔다. "~조사를 벌인 결과 3·15의거기념사업회가 조 열사의 사망 소식을 확인했다"라는 대목에서였다. 사실 조현대 열사의 희생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97년 경남매일 취재와 보도에 따른 것이다. 3.15의거기념사업회와 마산보훈지청은 경남매일 보도 이후에야 조현대 열사의 신원과 묘소, 가족 찾기에 나섰고, 결국 신원과 희생사실은 확인했지만, 묘소와 가족은 찾지 못한 채 2002년 3.15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또한 당시 경남매일은 기획연재기사를 통해 '12열사'가 아니라 조현대, 김동섭 열사를 포함해 '14열사'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생의거'가 아니라 '시민..

3.15의거기념사업회는 변할 수 있을까

‘마산 4.11민주항쟁은 4.19혁명의 첫날입니다.’ 이 문구에 3.15의거기념사업회(3.15사업회)가 발끈했다. 알다시피 4월 11일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날이고, 분개한 마산시민이 총궐기해 이승만 독재를 붕괴시킨 계기가 되었다. 3.15사업회 측이 발끈한 이유는 이랬다. “4.11이 첫날이라면 3.15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냐?” 이후 이 단체 김장희 회장과 해당 문구를 쓴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김영만 상임고문이 9차례에 걸쳐 지상논쟁(경남도민일보)을 벌였고, 급기야 지난 6일 열린 3.15사업회 주최 심포지엄에서도 이 문제를 공식주제로 다뤘다. 나도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참석했는데,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3.15만 홍보해오다가 이제는 4.11도 ..

3.15의거사에서 4.11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 발언록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 -저는 서익진 교수님이 3.15기념사업회 이사이고 학술출판분과장이라는 사실을 발제문 보고 알았다. -그리고 4.11에 대한 성격규정이 이렇게 예민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쪽에서는 당연히 4.11을 높게 평가할 것이고, 그렇게 홍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음. -저도 당시 거리에서 그 현수막을 보고, ‘아! 지금까지 3.15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4.11의 의미를 저렇게 부각하는구나’, 4.19혁명의 첫날입니다는 문구도 ‘카피를 참 잘 만들었네’ 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다뤄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면, 역사를 보는 관점이나 해석도..

꽃다발 들고 황점순 할머니 찾아뵙는 날

모처럼 반가운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지난달 이 지면을 통해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이귀순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제기한 형사 재심청구 소송이 검찰의 재항고로 인해 7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망백(望百)이 넘은 할머니들이 끝내 판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탄식이었죠. 그 후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도 대법원에 호소문을 냈더군요. “특히 4명의 피고인 중 제일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망 이용순의 처 황점순 할머니’는 돌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노파로 지금 한 요양원에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는데, 남편의 형사 재심 재판이라도 보고 세상을 떠나실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길 호소합니다.” 이런 글이 대법관들에게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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