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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본 곳 477

11. 매립과 보전이 맞서는 갈등의 광포만

사천만 잿빛 대지에 피어난 생명의 보고 1999년 새로 생겨난 지명 광포만은 사천 곤양면 중항·환덕·대진리와 서포면 외구·조도리로 둘러싸여 있다. 사천만의 서쪽 부분에 해당된다. 조선 시대에 곤양군이었던 지역을 움푹하게 파고들었다.(사천시가 대체로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통·폐합으로 곤양군과 합해지면서다.) 광포만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묵곡·목단·곤양·서포천 넷이다. 지금은 ‘광포만’이라는 지명이 횟집이나 부동산소개업체 상호에도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광포만은 낱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사천만의 일부였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광포만으로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말의 흥망성쇠는 필요에 따라 일..

가본 곳 2020.04.21

10. 사라질 뻔했던 마산만 봉암갯벌

다양한 생물 삶터로 경남 연안 첫 습지보호지역 갖은 욕설 내뱉던 개발업자 1999년 7월 19일자 경남도민일보 1면 머리기사는 봉암갯벌에 대한 것이었다. 기사 첫머리는 이랬다. “마산만의 유일한 갯벌인 봉암갯벌이 공장용도로 매립될 예정이어서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같은 해 5월에 삼원준설 등 4개 업체가 레미콘·콘크리트제품 공장 건설을 위하여 마산시 회원구 봉암동 21 지선 공유수면 1만3700평 남짓에 대한 매립 면허를 마산지방해양수산청에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삼원준설 대표는 경남도민일보에 대하여 갖은 욕설을 섞어가며 항의했다. “텅텅 빈 채 놀리고 있는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매립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갯벌에 오염물질도 없앨 수 있는데 반대만 한..

가본 곳 2020.04.19

9. 검포갯벌, 오랜 세월 쌓인 삶의 흔적

작은 가야? 센 가야! 고성군은 땅 모양이 반도(半島)처럼 생겼다. 북서쪽으로 육지와 이어져 있고 나머지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고성반도는 알파벳 ‘T’자를 대충 오른쪽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뉘어 놓은 ‘T’자의 북동쪽 끝이 동해면 외산리와 내산리이고 옆으로 뻗는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가 고성읍이며 남쪽으로는 통영시로 이어진다. 고성읍은 고성군의 중심이다. 읍내에는 송학동 고분군이 있다. 어지간한 동네 야산 정도로 커다랗다(실제 무기산舞妓山이라 했던 적도 있다). 2000~1500년 전 고성 일대를 쥐락펴락했던 지배집단의 무덤이다. 고려시대 스님 일연은 에서 고성에 있었던 가야를 일러 ‘소가야(小伽倻)’라 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고성을 두고 ‘작은’ 가야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가본 곳 2020.04.18

8. 마동호갯벌, 역사·문화 모두 풍성한 생태계

해방 이후 전국 최초 간척 마동호 갯벌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작점은 간사지교가 적당하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마을과 거류면 거산마을을 잇는 다리다. 여기 오면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조그만 빗돌이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다. 김정실(1904~69)은 고성읍 출신으로 1950년 6.25전쟁 직전인 5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성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1988년 2월 세웠다는 비문을 보면 김정실의 공적은 이렇다.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제 땅을 갖도록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 제2대 국회의원이 되자 곧 1951년 피난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당시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인 고성 간척지 조성사업을 온갖 열정을 다해 마침내..

가본 곳 2020.04.18

7. '어우러져 살아라' 토평천이 낳은 우포늪

'국내 최대 내륙습지'의 함의 창녕 우포늪은 우리나라 내륙습지 가운데 가장 크다. 우포·목포·사지포·쪽지벌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포는 127만8285㎡, 목포는 53만 284㎡, 사지포는 36만4731㎡, 쪽지벌은 13만9626㎡다. 모두 더하면 231만 2926㎡, 대략 70만 평인데 2012년 2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면적은 주변까지 포함하여 3배가 넘는 850만㎡다. 우포늪은 토평천이 낳았다. 토평천은 창녕에서 가장 높은 화왕산과 그 북쪽 열왕산에서 흘러내려 고암면 청간마을에서 물줄기를 제대로 이룬다. 토평천은 비탈진 골짜기를 빠르게 흐르다가 고암면 중대·도야마을에서 중대천·도야천을 만나면서 느려진다. 함께 흐르던 흙·모래·자갈·돌들이 쌓여 평평하고 너른 벌판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논밭으로..

가본 곳 2020.04.17

광려천을 둘러보았더니

[하천과 문화] (10) 너른 품에 철새들 노닐고 대부분 하천과 달리 북동진 삼계·원계서 폭 더 넓어져 노거수 많은 삼풍대 눈길 아파트 들어서며 인구 증가 곳곳 정겨운 풍경 만나지만 수질정화 방안도 고민해야 광려천은 광려산에서 시작한다.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와 함안군을 동서로 가르는 경계 구실을 하는 산이다. 산마루에서 북동쪽 직선으로 1㎞ 지점에 광산사가 있다. 그 옆에 보면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있다. 세상에 알려진 광려천의 첫 모습이다. 마산 내서읍 신감리까지 북동진하다 오른편에서 감천을 받아들이며 정북을 향해 흐른다. 우리나라 하천은 대부분 서쪽이나 남쪽으로 흐르는데 광려천은 그 반대다. 광려천은 삼계·원계 마을에 들면서 너비가 확 넓어진다. 비탈진 산지를 벗어나 평지에 이른 ..

가본 곳 2020.04.16

밀양강은 정자보다 별장

[하천과 문화] (9) 밀양 명문가, 풍경 좋은 곳에 별장 경영 달 비치는 연못 '월연대' 비경에 감탄 오연정은 서원으로, 반계정은 '소박함' 밀양강 하면 영남루가 너무 이름높아 밀양에는 다른 누각이나 정자는 잘 눈에 들지도 않는다. 영남루가 둘도 없이 멋지기 때문이다. 에는 영남루가 영남루인 까닭이 둘 나온다. 하나는 영남사(嶺南寺)의 누각이었는데 절이 없어진 뒤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1365년 고쳐 지으며 절간 이름을 갖다 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초기 고관대작 신숙주(1417~75)의 기록이다. "어느 고을이나 누각이 있기 마련인데 대체로 무엇이 보이는지에 따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이 누각만 '영남'이라 했는데 이는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다." ◇밀양 명문..

가본 곳 2020.04.16

경치 빼어난 요충에 자리잡은 삼랑창

[하천과 문화] (8) 1765년 설치된 조세창고 낙동강·밀양강 한눈에 해질 녘 노을·물새 '장관' 아전·뱃사공 규정 무시해 환곡 사채놀이 등 전례도 ◇조선시대 경남 내륙 조세 창고 조선 시대 조세 창고가 경남에는 셋이었다. 창원 마산창, 사천 가산창, 밀양 삼랑창이다. 삼랑창은 1765년, 마산창·가산창은 1760년 설치되었다. 삼랑창은 낙동강 강가에, 나머지 둘은 남해 바닷가에 있다. 조세로 받은 물품을 운송하는 수단이 주로 배편이라 그랬다. 김정호가 1860년대 작성한 에는 이렇게 나온다.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여섯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여 서울로 보냈다. 밀양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만호가 거느리고 가 바쳤다." 은 당시 정황을 1765년 11월 14일 자..

가본 곳 2020.04.15

왜적과 62대 1로 싸운 자리 작원잔도

[하천과 문화] (7) 300 조선군, 2만 왜군 막는 자리 서울~동래 길손 묵던 시설 '작원' 낭떠러지 외길에 왜군 진격 막혀 침략-방어 부딪친 '전략 요충지' 밀양 사람들, 작원관전투로 일러 당시 의기 기리며 위령탑도 세워 좁은 길 내는 데 흘린 피땀 느껴져 앞서 창녕 남지와 함안 칠서·칠북 일대 낙동강은 임진왜란을 겪은 영웅과 선비들이 장하게 뱃놀이를 한 자리라고 일렀다. 남강이 낙동강에 합해지는 용화산에서 곽재우 장군이 말년을 지낸 망우당이 있는 창암에 이르기까지다. 용화산이 마주 보이는 기강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 승전지이기도 하다. 거기서 하류 쪽으로 내려서면 곧장 삼랑진이 나온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밀양강을 받아들인 직후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군 진격을 막은 첫 자리 작원 ..

가본 곳 2020.04.14

이어지는 선인들의 낙동강 동범문화

[하천과 문화] (6) 맑게 놀았으니 멋진 이야기 남기지 않으랴 낙동강 뱃놀이 즐겨 절경 보고 시문 짓기 임진왜란 영웅들의 풍류 그뒤 꾸준히 언급 1607년 정월의 용화산 동범은 대단한 것이었다. 함안·창녕 일대 낙동강에서 벌인 뱃놀이는 용화산 동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용화산 동범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에는 이전 뱃놀이가 나오지 않는 반면 이후 뱃놀이 기록에는 용화산 동범이 빠짐없이 나온다. 그만큼 용화산 동범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창녕·함안 두 고을에서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을 맞아 분투한 한강 정구, 젊은 나이 당대 우뚝한 학자였던 여헌 장현광, 임진왜란 왜적에 맞서 싸웠던 경술 박충후 당시 함안군수가 이끌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가본 곳 20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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