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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노조가 블로거 8명을 초청한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09. 4. 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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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노동조합이 전국의 블로거 8명을 초청했다. 노조 간부들이 장애인과 함께 직접 지하철로 이동하는 체험을 해볼테니, 그걸 동행취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알기론 노동조합이 이런 행사를 하는 건 전국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조가 배포한 '장애인 이동권 체험 행사 블로그 취재계획서'에는 목적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근 장애인의 지하철 이용 중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부산지하철의 구조조정으로 직원 및 안전요원이 부족하여, 장애인 들 교통 약자의 안전한 이동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음.

지하철 노동자가 장애인의 활동보조인으로 함께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장애인의 이동권과 지하철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살펴보고, 부산지하철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과 장애인-부산지하철 노동자의 연대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


절묘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면서, 이를 사측의 인력 감축 시도와 연결시켜 그 문제점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부산지하철노조의 이동권 체험 블로그 취재계획서.


하지만 노조는 취재에 참여한 블로거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글을 써달라는 주문을 하진 않았다. 그저 취재의 장(場)을 마련해줄테니, 자유롭게 취재하여, 보고 느낀대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블로거들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장애인이동권이든, 노동환경이든 어느쪽에 비중을 두더라도 노조로선 손해 볼 일이 없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전국 최초로 시도된 노동조합의 동행취재 프로그램

이 행사를 위해 지하철노조에서 8명의 간부와 대의원들이 동원됐고, 부산장애인이동권연대 소속 4명의 장애인과 1명의 간부가 참여했다.

초청된 블로거 중에는 <국제신문>과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를 겸하고 있는 장세윤(블로그 필명 '세미예'김주완 두 명이 포함돼 있었고, 수도권에서 활동 중인 '한글로' 외에 '따뜻한 카리스마', '엔시스', '부사니스', '피부과학', '거다란' 등 부산지역 블로거 5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4개 취재팀으로 나눴다. 1팀은 수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지체장애인, 2팀은 시각장애인, 3팀은 목발을 사용하는 지체장애인, 3팀은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지체장애인을 각각 블로거 2명과 노조간부 2명이 동행하기로 했다.

4일 오전 10시 초대를 받은 블로거 8명이 부산 서면역 회의실에 모두 도착하자 부산지하철노조 남원철 교선부장이 말했다.

"블로거님들은 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활동보조는 동행한 노조간부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취재만 하시면 됩니다. 취재 과정에서 역장이나 역무원의 코멘트가 필요하면 노조간부에게 요청하십시오. 취재 중 점심시간이 되면 팀별로 알아서 드십시오. 식대는 노조에서 지급합니다. 자~, 지금부터 각 팀별로 동행할 장애인과 만날 장소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1팀에 소속된 나는 블로거 '엔시스'와 노동조합의 조상훈 역무지부장·이국조 대의원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북구 금곡동 동원역으로 향했다. 동원역에서 만나기로 한 지체장애인을 기다리는 동안 조상훈 지부장이 각 역에 배치된 인력현황을 설명했다.

장애인들과 4개팀으로 체험·동행취재

"원래 4명이 1개 근무조로 편성돼 3교대를 했는데, 5년 전부터 매표소를 없애고 자동발매기로 대체하면서 2인 또는 3인 1조로 근무하고 있죠. 그런데, 한 명이 휴가라도 갈 경우 2명 또는 1명이 근무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사측은 구조조정 명목으로 아예 무인역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전사고는 물론 장애인이나 노약자 보호는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지금도 장애인 안전사고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노인들이 굴러떨어지는 사고도 빈발하고 있는데, 효율성만 내세워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사람을 없애고 있으니 참 큰 일입니다."

이윽고 역 입구에 수동휠체어를 타고 나온 김주필 씨는 부산의 지하철역 휠체어리프트 문제를 거의 꿰고 있는 분이었다.

부산 금곡동 동원역은 계단이 너무 좁아 장애인이 휠체어리프트를 이용하는 동안 비장애인의 통행이 아예 불가능했다.


당장 동원역의 휠체어리프트가 있는 계단이 문제였다. 1m 남짓한 계단의 폭이 너무 좁아 장애인이 리프트를 사용해 오르내리는 동안 비장애인은 아예 계단을 이용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승강장에 설치된 장애인 승차보조대의 위치도 문제였다. 계단과 가까운 곳에 설치한다는 의도였겠지만, 차량이 정차했을 때 기관실과 너무 먼 곳이어서 기관사에게 보이기 어려운 거리였던 것. 특히 곡선역의 경우 아예 기관사가 장애인의 승·하차를 볼 수 없는 곳에 대부분 위치해 있었다.

장애인 승차보조대는 대부분 기관실과 너무 멀리 있었다. 이런 곡선역에서는 장애인이 타고 내리는 것을 기관사가 아예 볼 수 없다.


김주필 씨는 "시설을 설치할 때부터 장애인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 없었던 게 문제"라고 말했다.


승차보조대를 설치할 수밖에 없는 승강장의 높이도 문제였다. 아예 처음부터 장애인의 휠체어를 고려해 차량의 높이와 승강장의 높이를 일치시켰다면 굳이 보조대를 설치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강장이 차량보다 10cm가량 낮게 시공돼 쓸데없는 예산을 낭비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린 곳은 수정역이었다. 이곳은 승강장에서 대합실까지 올라가는 휠체어리프트가 아예 작동되지 않았다. 한참을 헤멘 끝에 대합실까지 엘리베이터가 새로 설치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휠체어리프트 앞에 안내문조차 없어 헤멘 것이었다.

대합실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휠체어리프트는 떨림이 너무 심했고, 소음도 커 지켜보는 사람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낡아 삐걱거리는 기구를 타고 불안해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프트로 올라가는 시간도 무려 15분이나 걸렸다.


역장은 "구형 리프트여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구형 리프트의 경우, 용량이 적어 진동휠체어나 스쿠터의 경우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주필씨는 "서대신동 대티역의 경우 아예 리프트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말했다.

결국 대책은 모든 역에 지상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뿐이었다. 부산교통공사는 2013년까지 엘리베이터 설치를 완료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때까지는 장애인이동권의 제약이 불가피했다.

미래를 보지 못한 탁상행정 실태 드러나

지상까지 통하는 엘리베이트는 거의 없다.

엘리베이터가 이미 설치돼 있는 곳도 대부분 승강장에서 대합실까지뿐이었고, 지상까지 연결된 곳은 몇몇 대형 역뿐이었다.

왜 처음부터 역을 건설할 때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비단 장애인 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는 물론 비상사태 때 부상자 후송 등 많은 요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조상훈 지부장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행정 탓"이라고 잘라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도 문제였다. 이용자들을 유심히 봤더니 노약자나 장애인보다 중년 여성들이 훨씬 많았다. 동행취재를 마치고 물만골역 지하철노조 역무지부 사무실에서 열린 평가회에서 30대 초반의 한 시각장애인은 이렇게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장애인이나 노인들보다 사실 40대 주부들이 가장 많이 이용합니다. 우리 같은 젊은 시각장애인이 타면 '나이도 어린 놈이 탄다'고 욕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시각장애인과 동행했던 블로거 '한글로'는 "지하철역에 설치된 점자블록 중 제대로 승차보조대로 연결된 게 거의 없었다"면서 "점자블록을 따라 가다보면 막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곳도 허다했고, 심지어 물만골역의 엘리베이트는 버튼의 상(上)·하(下)가 거꾸로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점자블록을 설치했지만 결국 시민의 세금만 낭비한 꼴이라는 것이다.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트이지만, 가장 많은 이용자는 40대 여성이라고 한다.


블로거 '거다란'은 신평역에서 만난 여성장애인의 말을 듣고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역시 장애인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과 함께 외출을 못해봤다고 하더군요. 현재의 엘리베이터나 리프트 시설로는 한 명씩밖에 이용할 수 없어 먼저 한 사람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다시 리프트를 내리고 올라가는 동안 30~40분씩 기다려야 하고, 두 사람이 지상까지 완전히 올라가려면 한 시간이 훨씬 더 걸리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다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소재도 문제였다.

부산교통공사가 지난 1일 장애인단체들에 보낸 '부산지하철 1·2호선 휠체어리프트 안전이용 홍보협조'라는 공문에는 그동안 발생했던 중대사고 사례가 예시돼 있었는데, 한결같이 '(장애인의) 운전조작 미숙으로 인한 급발진 추락'으로 사고원인을 규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에 관한 소송에서는 해당 역에 근무하던 지하철노동자에게 벌금형이 선고되고 있었다.

지하철노조 남원철 교육선전부장은 "결국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회사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근무하던 직원에게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또 부산교통공사가 제정한 '승강기 검사 및 관리에 관한 운용요령' 제3절 22조 이용자의 준수사항 5항과 6항에는 내가 보기에도 황당한 내용이 있었다.

"조작반의 비상정지스위치 등을 장난으로 조작하지 말아야 한다." "휠체어리프트 내에서 뛰거나 구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그야말로 장애인을 다루기 힘든 문제아 쯤으로 보는 왜곡된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문구로 보였다.

이젠 노동조합도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체험행사'는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가량 평가회를 끝으로 오후 5시에 끝났다. 평가회 시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단체들이 '연대'를 이야기할 때 흔히 다른 단체의 집회에 함께 참석해주거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려주는 것 정도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하철노동자가 장애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해결하겠다는 오늘 행사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노동조합의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행사를 조합 예산도 많고 상근자도 많은 대기업노조나 금속노조 같은 데서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부산지하철노조 역무지부 사무실에서 열린 평가회.


사실 이제는 노동조합도 국민 여론의 지지없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공무원노조가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민주노총조차 위기에 몰린 것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 크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번 부산지하철노조의 행사는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8평의 기자와 블로거들은 각자 본대로 느낀대로 신문이나 블로그에 글을 쓰기로 했다. 어떤 글들이 나오게 될지,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다. 월요일엔 블로고스피어를 더 꼼꼼히 살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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