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비실비실 소나무에 솔방울 많은 까닭은

김훤주 2009. 3. 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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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산에 갔습니다. 날씨가 흐렸습니다. 이른 시간대다 보니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산길은 호젓하기만 했습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꼬이는 산길을 따라 걷다가 등성이를 하나 넘으니 내리막길이 나왔습니다. 이제야 고개 들고 나무들을 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가다 보니 군데군데 솔방울 잔뜩 달고 있는 소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웅장하지 못하고 이파리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아픈 모양입니다.

옛날 같으면 ‘뭐 저렇게 비실거리면서도 열매는 참 많이 매달고 있네, 이상도 하지. 나무한테도 무슨 욕심이 있나?’ 이랬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2002년과 2003년 우리 ‘경남도민일보’에 ‘최송현의 숲과 나무’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부산대학교와 통합이 된, 밀양대학교 조경학과 최송현 교수를 모시고 이런저런 나무 얘기를 들려주는 자리였습니다.


1.
최송현 교수한테 저는 많이 배웠습니다. 한 주일에 한 차례씩 얘기를 들려주면 그것을 정리했다가 사진과 함께 풀어주곤 했는데요, 꽃 피우는 얘기, 경쟁을 피하는 얘기, 나무의 생리 등등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때 들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실비실하는 나무가 열매는 많이 맺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렇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나무든 풀이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종족 보존 본능이 있답니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세 해 정도 유충 생활을 거쳐서 어른 벌레가 되면, 길어도 보름 정도까지밖에 살 수 없는데, 기를 쓰고 번식을 위해 짝짓기를 하느라 먹는 것도 잊어버리는 바람에 입이 퇴화됐다고들 합니다만.)

나무가 시들시들해지면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하는 줄 바로 알고 자손을 많이 흩뿌리기 위해 있는 힘껏 열매를 만들어내어 놓는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현상은 모든 나무에 보편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처가 오래 돼 썩고 있는 참나무.

옛날 사람들은 나무의 이런 속성을 활용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골 같은 데 가면 그런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같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류(類) 가슴팍에는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급하면 식량으로 쓰기도 하는 도토리를 많이 얻으려고, 사람들이 이처럼 일부러 나무를 돌로 찧어 상처를 냈습니다. 나무가 이처럼 약해지면 자기가 얼마 못 가 죽겠다고 지레짐작하고 열매를 많이 만들었답니다.

상처를 냈는데 움푹 파여야 맞지 어떻게 두툼하게 살이 붙었느냐고요? 나무에 상처가 나면 나무는 이를 치료하려고 진액을 내뿜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 구황(救荒)에 쓰이기도 했던 참나무 무리의 ‘아픈’ 사연입니다.

2.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개나리 목련 벚나무 매화 철쭉 진달래 따위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잎보다 먼저 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글쎄요. 정확한 얘기는 나중에 나무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장치가 나와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 수준 짐작으로는 (잎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데 가진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른 봄에 꽃을 피울까요? 다른 나무들 다들 꽃피우는 5월 6월에 자기네들도 꽃을 피우면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경쟁을 하지 않으려고 앞당겨 꽃을 피우는 것 같답니다.

매화 벚꽃 진달래 철쭉 따위는 풍매화(風媒花)로 분류됩디다. 왜 그리 됐을까요? 경쟁을 피하기는 했는데, 이른 봄철이다 보니 꽃가루를 옮겨주고 비벼줄 벌 나비 따위 곤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꽃들이, 안 되겠다 우리 바람 힘을 좀 빌리자, 이리 됐답니다.

풍매화는 꽃향기가 적거나 없습니다. 반면 충매화(蟲媒花)는 향기가 짙고 꽃잎은 화려하기까지 합니다. 벌 나비 잠자리 같은 곤충들을 꾀어 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들 따뜻한 5월 6월에 꽃을 피우려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3.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수정(受精)을 위한 벌·나비 따위 유치 경쟁입니다. 끌어들이려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꽃향기는 짙어지고 꽃잎은 크게 화려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풍매화에게 고유한 특징들은 갈수록 수그러들고 사라지겠지요.

그러고 보니, 나무 세계에서도 경쟁이 획일화를 낳게 되네요. 이처럼 획일화되면 제각각 제 살고 싶은 방식과 내용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겠지요. 어쩌면 나무 세계에서도 이렇게 경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지 이처럼 다양해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 

아마,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입시 위주 교육, 발전 방향은 오로지 하나뿐이라 여기고 일본 따라잡기 그리고 미국 따라잡기 같은 경제개발 지상주의 풍토 따위가 경쟁을 부추기는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일 텝니다. 저는 우리가 또다른 미국 사람이나 또다른 일본 사람이 되지 않고 마냥 그대로이면 좋겠습니다.


김훤주

한국의 소나무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정동주 (명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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